[역사 중편소설]
휭몰아 치는 폭풍
빨래터에 모인 아낙들은 빨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요즘 서라벌 정세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아낙들의 걱정과는 반대로 한동안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폭풍 전야처럼 정국은 고요했고 가난한 백성들은 일상처럼 첨해 이사금을 원망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첨해 이사금이 계림국의 군주가 된 지 14년이 되는 섣달 28일 새벽 *묘시(卯時)가 좀 지난 시각이었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대취한 첨해이사금은 후궁과 영명궁(永明宮)에 잠들어 있었다. 한 무리의 복면을 쓴 괴한들이 월성 동쪽 담장을 넘었다.
서라벌 전역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월성은 쌓인 눈으로 설백(雪白)의 세상으로 바뀌고 철 없는 궁인들은 눈이 내린다면 즐거워했다. 궁궐은 여느 때처럼 고요했는데 한 쪽에서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린 눈으로 사람 그림자와 발자국 조차 눈속에 묻힌 상태였다.
순라를 도는 궁궐 수비 군사들이 영명궁 주위를 한바퀴 돌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날이 밝고서야 세상이 뒤집힌 일이 알려졌다. 궁궐 수비 군사들이 발빠르게 움직이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제일 먼저 각간 장훤(長萱)이 입궐했고 뒤 이어 몇몇 중신들이 등청했다. 그들은 각간과 구수회의를 하며 긴급사태를 논의했다. 간밤에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던 대소신료가 허겁지겁 입궐했다.
“이사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궁인들이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고 있으니 말일세.”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백제놈들이 또 국경을 넘었거나 왜놈들이 쳐들어온 게지. 그렇지 않고서야 새벽부터 난리를 칠 일이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사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요즘 들어 박 씨, 석 씨, 김 씨들이 눈에 불을 밝히고 으르렁대더니 기어이 일이 터진 거야.”
대전으로 몰려든 신료들은 별의별 추측을 해가며 입방아를 쪄댔다. 두 시진이 지나서 각간이 비통한 모습으로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대전에서 조회(朝會)나 어전회의를 열 때면 보통은 이사금과 각간이 나란히 들곤 했다.
“여러분께 비보를 알려드립니다. 간밤에 이사금께서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으로 붕어하셨습니다. 당분간은 이 사람이 고위 중신과 박, 석, 김씨 문중의 대표들로 구성된 귀족 회의 의장이 되어 비상시국을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늦어도 한 달 내로 차기 군주를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계림국의 차기 군주를 선정하기 위한 절차를 속히 진행해 국정에 마비가 없도록 진력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믿고 각자의 위치에서 본분에 온 힘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장훤은 이전의 각간이었던 석우로가 죽고 난 뒤부터 각간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계림국 조정 내에서 옥모 태후의 최측근 인사이기도 했다. 그는 대소신료에게 자신이 목격한 바를 사실대로 말하면 계림국은 자칫 내전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관에 안치된 첨해 이사금의 시신은 잠자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중신들은 감히 이사금의 시신에 손을 대거나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첨해 이사금이 지난해부터 몸이 마르고 가끔 각혈까지 하던 터라 아무도 그의 죽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각간이 한참 동안 권좌 옆에 서서 아무 말도 없자 대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대전에는 첨해 이사금의 친인척뿐만 아니라 박, 석, 김 씨의 대표들도 참석해 있었다. 계림국의 권력을 분산하여 쥐고 있는 세 성씨의 대표들은 웬만한 중신보다 발언권이 세었다.
“그 아이가 결국에는 세상을 버렸구나.”
장훤은 고구려 국내성으로 사신을 급파하여 첨해이사금의 붕어를 알렸다. 그미는 고구려로 돌아온 뒤로도 태왕과 늘 함께하면서 고구려 국정을 좌지우지하였고, 태왕의 비빈들은 감히 그미를 투기하거나 시기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미는 계림국 사신의 예방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드디어 우리 김 씨의 세상이 왔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미추(味鄒)를 차기 계림국의 군주로 옹립하도록 내가 배후에서 힘을 써야 한다. 지금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우리 김 씨 가문은 영원히 박 씨나 석 씨들에게 억눌려 살면서 *색공(色供)이나 바치며 왕비족에 만족해야 한다. 내가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우리 김 씨 문중과 원통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
그미는 생각을 정리하고 태왕을 찾았다.
“그래요? 계림국의 첨해이사금은 왕비의 아들 아닙니까? 왕비의 아들이면 짐의 아들도 되니, 아비인 짐이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첨해가 여러 해 전부터 병을 앓아왔다 들었습니다. 결국, 몸이 잔약하여 이승을 등졌으니, 속히 후임자를 정해야겠습니다. 하지만 계림국에는 군주가 붕어하면 귀족 회의에서 의논하여 차기 군주를 뽑는다 들었습니다. 첨해에게 후사를 이을 아들이 있던가요?”
* 색공 -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색(色)을 바치는 일
“폐하, 첨해에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소첩에게는 조분과 첨해, 두 아들이 있습니다. 조분은 첨해 이전 계림국의 군주를 지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걸숙(乞淑)과 유례(儒禮)라는 아들이 있습니다만, 모두 하찮은 후궁의 소생이고 어려서 할 수 없이 첨해가 군주를 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두 손자가 장성하였습니다. 하오나 아직도 영민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여 나라를 책임질만한 그릇이 못 되옵니다.”
“왕비는 누가 차기 계림국의 군주가 되면 좋겠습니까?”
“폐하, 현재 계림국에서 가장 쓸만한 인재는 소첩의 아우 김미추밖에 없사옵니다. 미추가 소첩의 아우라 폐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미추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뛰어나고 만백성을 아우를 만큼 빼어난 군주의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계림국은 박 씨와 석 씨가 번갈아 가며 군주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그 두 씨족은 백성들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소첩의 두 아들도 석 씨인데 오죽하면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이에 반해 소첩의 가문은 수백 년 동안 계림국의 국모(國母)를 배출하며 군주를 보좌하고 지지하면서 지금까지 조용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소첩을 은애 하신다면 다음번 계림국 군주는 소첩의 아우가 맡도록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림국 군주는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소첩이 고구려와 인연을 맺은 후 계림국과 고구려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장차 중원대륙으로 더욱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후방의 안정이 필수적입니다. 만약, 백제나 왜국이 고구려의 후미를 공략하려 든다면 계림국이 나서서 그 두 나라를 저지해야 합니다. 소첩의 충심을 깊이 헤아려 주세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