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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리 Feb 21. 2023

마중

추억의 길 위에서

오늘도 비가 온다. 

봄부터 잦은 비가 내렸지만 그리 싫지 않은 이유는 우리 딸이 그랬듯이 새로 구입한 예쁜 우산 때문만은 아니다. 비 오는 날에 있었던 가슴 따뜻한 추억! 특별히 챙김 받던 행복한 기억 때문이리라. 

 

이른 봄부터 논갈이와 밭 고르기로 분주했던 내 고향 마을, 시골의 사계절은 오순도순 가족이 둘러앉아 정담을 나눌 기회가 참 드물었다. 아침밥 먹여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나면 부모님은 논과 밭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쁘고 일이 많았던 것이다. 

 

학교생활의 어려움이나 친구사이 고민거리가 있다 해도 부모님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부모님은 자식들 밥 안 굶기고 제 때 학교에 보내는 것이 최선이던 때, 수 십 년 지난 지금 생각해 봐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시골 삶의 예외적인 일이 추억의 페이지에 곱게 담겨있다.  





 

온 하늘이 먹구름으로 덮이더니 비를 가득 몰고 왔다. 등교할 때는 맑았던 하늘이 공부를 마칠 무렵에는 시커먼 구름에 덮여 비를 퍼부었던 것이다. 집이 가까운 아이들은 가방을 머리에 이고 달려갔지만 아이들 걸음으로 족히 한 시간은 걸어야 하는 우리들은 쏟아지는 장대비를 보며 현관 앞에서 움츠려 들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은 고사하고 집집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다. 

 

운동장 가로질러 마주 보이는 교문 앞에는 마중 나온 우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색색의 고운 우산도 아니고 대부분 푸른 비닐우산이었고 간혹 큼직한 검정우산도 보였지만 아무래도 좋다. 우산살이 부러져 꺾인 것이든 찢어진 우산이거나 하우스 비닐 조각을 준비해 왔어도 누군가 나를 마중 나왔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뚫어져라 교문주위를 살피던 내 눈에 젊은 엄마들 틈, 밭에서 막 뛰어온 차림으로 우산을 받쳐 든 울 엄마가 보였다. 와! 우리 엄마도 오셨다. 마음속에서 환희의 외침이 치솟았다. 한달음에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달려가니 엄마가 마주 나오며 우산으로 맞이한다. 이쁘게 화장을 하시는 친구들 엄마와 달리 늘 할머니처럼 쪽진 머리의 우리 엄마, 밭에 호미 던져놓고 쏟아지는 빗속에 걸음을 재촉해서 딸내미 마중을 온 것이다. 

 

빗줄기를 뚫고 마중 오신 우리 엄마는 내 위 언니들과 오빠들의 엄마였고 몸이 약해 골골대던 동생의 엄마이기도 하다. 많은 형제들 중간쯤 끼인 나는 늘 엄마의 사랑에 목말랐다. 공부 잘하는 언니와 집안일을 척척 잘하는 언니들, 또 몸이 약한 막냇동생을 둔 나였기에 엄마를 차지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오직 나만을 위해 그 많은 일을 뒤로하고 마중 오신 우리 엄마를, 그날의 기쁨과 감격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요즘같이 자녀에게 모든 필요를 넉넉히 채울 수 없던 그 시절,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던 그때 엄마가 내 옆에 나란히 걷는다는 것에 마냥 행복했던 날을 추억하며 나는 마중을 즐겨 다니곤 한다. 

 

결혼 후 비교적 정확한 시간에 오던 남편의 퇴근길에 전철역으로 매일 마중을 나갔었다. 

개찰구를 통과하며 눈으로 찾는 남편에게 손을 흔들면 활짝 웃으며 다가왔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첫딸을 낳아서는 유모차에 태워 마중을 나갔고 아이가 제법 걸을 때 아빠가 나오면 두 손을 높이 들고 달려가던 추억이 가슴 아리다. 

 

지난봄, 뭐가 그리 급했는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남편은 이제 우리를 기다리며 우리 마중을 준비하겠지! 나 어릴 적 엄마와 먼저 보낸 남편을 생각하며 그리움의 상념 속에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엄마, 어디야? 20분 후 상록수역으로 마중 나올 수 있어?” 딸내미의 물음에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한다. 유모차에 태워 아빠마중을 다녔던 그 길, 멋진 어른으로 커버린 우리 딸 마중길을 그리움 가득 담고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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