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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리 Feb 27. 2023

밝은 밤

-수많은 엄마와 딸-

 <밝은 밤>은 한 줄로 이어 간 여자들의

서사가 격랑기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아픈 시대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할머니와 엄마, 엄마와 딸. 모녀관계는 어느 시대든 할 말도 많고, 말로 표현할 수 없어 그대로 가슴에 묻어버리는 숱한 감정도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시간을 함께 채우며 살면서도

서로 닿지 않는 마음의 거리로 인해 번민하는, 무한한 위로이면서도 상처를 깊게 남기는 관계가 엄마와 딸이 아닐까.


거의 한 세기를 거치며 삶을 이어 간

어머니들과 딸들의 이야기, 그들이 겪어 온 거친 삶과 상처투성이의 모습에 한없이 일렁이는 내 마음을 다독인다. 나의 어머니와 서른두 살의 딸을 생각하면서...


처음 이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코 짧은 분량이 아님에도 단번에 읽히고 그 인물들이 살았던 각기 다른 시대의 아우름이 놀라웠고 작가가 삼십대라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최은영의 장편소설 <밝은 밤>,

심심찮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어머니의 어머니이야기, 여자의 일생이라는 등, 남들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크게 구미가 당겨지지는 않았었다.


2022년 안산시의 책으로 선정이 되고

도서관마다 책을 소개하는 현수막이 붙었는데 잔잔한 새벽 바다처럼 보이는 표지, 밤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제목이 왜 ‘밝은 밤’일까!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시작되는 첫 문장이 열리고 32살의 지연이 담담하게 어린 시절, 잠깐 할머니와 지냈던 이야기를 한다.


길게 늘어지지 않은 짧은 문장,

소소한 내용이지만 어릴 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는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의자를 당겨 책상으로 다가앉게 한다.


할머니와 행복했던 추억이 있는데

그 후 이십여 년 동안의 단절, 그 할머니와

우연히 만나지만 알아보지 못했고 서로를 확인한 후에도 너무 어색한 분위기다.


도대체 이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는 걸까

를 좇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책장까지 멈출 수

없게 되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한 삼십 대 초반

지연은, 역시 힘든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엄마를 본다.  평생 남편의 밥상 차리기에 매여 있고 시댁 식구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온 엄마.


자신의 이혼 문제로 엄마와 번번이 생각이 엇갈리고 잦은 감정 충돌로 인해 가능한 서로 거리를 두며 피하고 있다.      


희령으로 직장을 옮긴 지연은 우연히 할머니를 만나고,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사대에 걸친 이들의 가족사가 펼쳐진다.


할머니의 어머니 증조모는 백정의 딸이었다.

일제 강점기, 젊은 여자는 닥치는 대로

잡아가던 시절, 간신히 도망쳐서 결혼했지만 백정의 딸 꼬리표는 증조모를 피눈물 나는 삶으로 몰아간다.


철저하게 그림자 취급하는 사람들의 차별과

멸시에 어린아이들까지 공포의 대상이었고 증조모가 외로움의 절망 속에 있을 때 만난

사람이 ‘새비’였다.     


처절하게 팽겨 쳐진 낯선 삶,

황량한 거리에서 만난 두 여인, 증조모와 새비의 깊이 있는 인간애는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처음 만났을 때 그리 친절하게 잘 대해주던 사람들이 백정의 딸인 것을 알게된 후 차갑게 돌변하는 것을 겪은 증조모가, 자신에게 따듯한 마음을 보내는 새비도 그리 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리다.


하지만 서로 태생지 이름으로 부르고 불리며

마음 곁에 있어주고, 위기 때마다 서로를 지켜내는 모습이 잔잔한 울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게는 이런 친구가 있는지, 온 삶으로 진정

어린 우정을 나누는 관계가 있는지 돌아보았다. 사람으로 인한 찢어지는 삶의 고통도 역시 사람으로 인해 회복되고 삶의 이유도 발견하게 됨을 소설을 통해 한번  확인한다.     


증조모와 새비, 두 가정이 겪은 일제의

가혹함과 전쟁의 상처 등, 시대의 짙은 아픔과 고통이 가족 모두에게 뼛속 깊이 저며 들었다.


남북전쟁의 소용돌이는 증조모 가정을

개성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희령으로 이끌었고, 할머니는 증조부의 소개로 할아버지를 만났지만 할아버지가 이미 북에서 결혼한 사실이 밝혀지고 할머니의 결혼은 파경을 맞는다.


자신의 딸을 다른 호적에 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 아픔을 삼키며 할머니는 꿋꿋이 딸을 길러 낸다. 하지만 할머니의 노력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삶의 고통을 감내하며 상처 투성이로 살아온 엄마를 마주하는 지연이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할머니, 할머니의 엄마. 몇 대를 걸친 엄마와 딸 이야기 속에 그들이 살았던 아픔의 색깔이 처연하게 아롱지다.


억압과 착취가 일상이었던 일제 강점기와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숨죽였던 시간, 또 전쟁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거쳐 온 여인들의 이야기들이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달, 그 달은 어머니와 딸들이 아닐까! ‘밝은 밤’의 주인공들.     


그녀들이 감내한 세월의 가슴에는 각양각색의

멍 자국 무늬가 있을 것이다. 자기 삶의 분량만큼 아픔의 크기까지도 제각각일 것이고.


서른둘의 지연이가 엄마와 충돌하며

서로를 알 수 없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도

엄마가 지나 온 시간과 지연의 시간이 같을 수 없음일 것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이십여 년, 시간 너머에서 강요하지 않고 기다린 것도 서로가 견뎌야 할 아픔의 시간을 알았기 때때이리라.


모녀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몇 번이나 격한 감정이 올라왔다. 서술자로 등장하는 지연처럼 우리 딸 역시 서른두 살의 나이이고 서로 충돌을 피하려 애쓰는 모습 속에 나와 우리 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왜 마음과는 달리 다른 말이 툭 튀어나와 아물지 않은 곳을 또 건드리게 되는지. 심적 거리를 두리라 모질게 마음을 먹다가도 조금이라도 힘든 모습 보이면 바로 무너져 내리는 게 자기식대로 사랑하는 모녀의 마음인 것을.        


한 권의 책에 백 년의 격동세월을 담은 것이 놀랍기만 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물들,

이름도 없이 태생지로 삼천이,새비로 불리는 여인들이지만 그녀들의 눈물과 진땀으로 딸들이 자라고 오늘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기적이 만들어지고 있다.


평범한 우리 독자들 역시 딸들을 키워내며 시대의 ‘밝은 밤’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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