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 1일차
최근 활동하고 있는 '국인'이란 대학생 단체에서 좋은 기회를 얻어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제8회 아시안 리더십 컨퍼린스에 다녀왔다. '초불확실성 시대의 뉴 리더십'이라는 큰 틀 안에서 진행된 이번 컨퍼런스는 '리더와 혁신', '동북아 평화협력', '포커스 온 차이나', '글로벌 경제 전망'과 같은 국제 정치 및 경제 관련 세션 뿐만이 아니라 '헬스 테크와 지속가능한 삶의 미래'와 '딥테크 스타트업 레볼루션'과 같은 4차 산업 혁명과 관련된 세션까지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있어 관심 있는 이들에게 굉장히 유익한 경험이 될 듯 하다. 첫째 날인 오늘 나는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서 일부만 참여했는데, 참여한 세션 모두 세계 각국 리더십의 교체와 반세계화 등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맞아 새로운 리더십에 대해 논하는 'ALC 이니셔티브' 트랙에 포함된 것이었다. 그 중 특히나 흥미로웠던 세션은 '보호무역시대의 생존전략 : 상생을 위한 협력의 길'이었다.
세션: 보후무역시대의 생존전략: 상생을 위한 협력의 길
연사 : 김종훈 전 한국 통상교섭본부장, 웬티 커틀러 전 미국 무역대표부 부대표, 이드리스 잘라 전 말레이시아 총리 직속 국가개혁프로그램 직속 고문, 토마스 렘봉 인도네시아 투자조정청 청장, 란지용 중국 칭화대 교수
세션은 사회자가 각국 연사들을 소개한 다음 연사들의 간단한 연설, 사회자의 공통 질문, 그리고 청중과 질의 응답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본 세션의 5명의 연사들과 이전 세션에 참여한 에스코 아호 전 핀란드 총리와 엔리코 레타 전 이탈리아 총리 등의 리더들은 보호무역주의 흐름 대두와 앞으로의 국제 정세 전망에 대해 공통된 입장을 보인 점도 상당히 많고, 처음 접한 관점도 다소 있었다. 세션에서 각국의 연사들이 어떤 생각과 자료를 근거로 어떤 발언을 했는지 간단하게 소개해본다.
1. 보호무역주의와 반글로벌화의 후퇴, 유로존의 성장
자유주의적 정치관을 지닌 이들은 공통적으로 세션의 주제인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면서, 최근 대두된 보호무역주의와 반글로벌화 움직임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에스코 아호 핀란드 전 총리는 자국 우선주의, 포퓰리즘, 민족주의와 같은 위험이 있더라고 '협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오바마 행정부에 이어 트럼프 행정부와 연이어 일하고 있는 토마스 렘봉 인도네시아 투자조정청장 또한 높은 수준의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에 대한 반발은 이미 최고점을 지나고 있다고 말했다. 2016년 4월 브렉시트를 전후로 유럽 내 극우 민족주의 세력과 정당의 지지도가 올라가서 유럽 통합에 균열 조짐이 보였었지만, 최근 있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 유럽의 주요 선거에서 극우 정당의 득세를 막으며 고비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올해 남은 독일의 연방 선거를 또한 메르켈의 4선이 유력시 되고 있기에 유럽의 극우화 위협이 일단 줄어들었다는 점에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기도 하다.
유럽의 전 총리들은 유럽 내 반글로벌화 움직임 축소에 더해 유럽연합과 유로존의 성장을 이야기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으로 위기를 맞았던 2016년과 달리, 2017년의 유럽은 통합에 대한 의지를 새로 다졌다는 설명과 함께 2014년을 기점으로 장기 침체에서 벗어난 유로존의 경제성장률이 미국을 넘어섰다는 것을 강조했다. 말하는 분위기로 보아하니 트럼프 행정부의 집권이 장기화됨에 따라 유럽의 패권적 지위가 구축될 것이라 예상하는(혹은 믿고 싶은) 듯 하다. 독일 선거 이후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선 다음 핵을 보유하고 안보리 거부권을 지닌 프랑스와 실질적인 경제적 영향력을 가진 독일이 손을 잡고 유럽 연합의 경제와 안보를 위해 힘을 쓴다면 유럽의 통합이 재편성될 것이라 예측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새로운 통합 이후 의제의 95%가 유럽 내부 문제를 다루던 유럽 이사회가 의제의 20%까지 세계 이슈에 관한 것으로 늘리고, 트럼프 이후의 미국이 등한시하는 아시아에 대한 관여를 높인다면 국제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다.
2. 자유 무역 협정을 넘어 진정한 '자유 무역'으로
대부분의 연사들이 '규칙에 의한 무역', 즉 FTA와 같은 무역 협정의 가치를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한미 FTA 협상에 참여한 김종훈 전 의원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은 우루과이 라운드와 같은 전면적인 규칙에 입각한 변화로부터 나왔고, 각종 협정의 도움으로 국제적인 기준을 따라갈 수 있었다 말했다. 미국의 연사 또한 대한민국이 규칙에 따른 다자간 무역을 성장했다는 점에 동조했다. 이에 첨언해서 이드리스 잘라 전 말레이시아 특별고문은 관세 장벽을 해소하려는 노력과 함께 비관세 장벽에 대한 경계를 강조했다. 보호무역 정책에는 관세를 통해서 수입품의 가격을 높여 국내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인 '관세 장벽'과 관세 이외의 다른 인위적인 규제를 가하는 '비관세 장벽'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관세 장벽을 낮추고 협정을 맺어 타국에서 자국에 의사나 변호사가 들어온다고 한들 그들을 규제하는 의사 협회, 변호사 협회 등으로 인해 실질적인 '자유 무역'이 불가능한 것이다. 자유 무역 협정과 자유 무역이 다르고, 또 자유 무역 체결과 이행은 또 다른 것이라 설명하며 실질적인 측면의 자유 무역을 위해 힘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3. 국가와 기술관료, 새로운 리더십의 방향은?
새로운 리더십과 기술 관료가 지녀야 하는 태도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현재 여러 국가나 국제 기구들의 기술 관료들이 자국민이 원하는 기대치보다 뒤쳐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국제 회의에서 위생 관련 규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은 전자상 거래나 온라인 거래, IT 기술들에 관심을 갖는 다는 것이다. 이렇게 관료와 시민의 관심 사이에서 극간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인도네시아 투자조정청장은 비관적인 전망을 보였다. 두 번째는 자유무역에 대한 인식의 제고이다. 자유무역이 실질적으로 많은 국가들에 거시적인 경제 지표 상으로 이익을 주고 있음에도 중소기업이나 일반 시민들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자유 무역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유 무역 국가에서도 만연한데, 멕시코 같은 경우에도 NAFTA로 많은 이득을 보고 있지만 3-40%의 국민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모든 자유 무역을 불공정 무역으로 치환해버리는 일반 시민들을 설득하고 자유무역이 어떤 점에서 그들에게 좋은 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새로운 리더십의 과제라는 점에 연사는 물론 청중들도 공감했다.
0. 과연?
두 번째와 세 번째 논점같은 경우는 상당 부분 공감이 간다. 단순히 우리가 아는 기본 관세 뿐만이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에도 큰 피해를 주고 있는 반덤핑 관세나 상계 관세 등의 영향력이 굉장히 크고, 제대로 된 자유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관세 협정은 물론 비관세 영역에서도 많은 논의와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맞다. 국가 관료가 일반 시민들의 요구와 흐름에 못미친다는 점, 그리고 자유무역의 타당성과 설득력이 소기업이나 국민들에게는 부족하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 또한 동감한다. 하지만 유럽의 전 지도자들이 말한 유럽의 패권, 혹은 중국 교수가 언급한 '자유의 기치'로서의 중국에는 의문이 들었다.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유지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오랜 시간 동안 국제정치에서 논의되어 온 사항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으로 세계의 자유 질서의 중심에 있던 미국이 다른 길을 걸어가자 그들의 쇠퇴를 주장하며 이런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미국 쇠퇴론 + 타국 부상론은 몇십년 째 논쟁으로만 반복되고 있다. 미국쇠퇴론은 1950년대 제시된 소련 부상론에서 시작되어 80년대 유럽 부상론, 90년대 일본 부상론, 그리고 00년대 중국 부상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위에서 유럽만 언급하였는데, 세션에 참여한 중국 교수도 자유주의의 상징이었던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 노선을 걸으며 상징적 지위를 포기한다면 이를 중국이 대체할 수 있다는 패권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중국부상론에 대한 논의와 그 쇠퇴는 최근까지 많이 이루어졌으니 생략하고, 유럽의 전 지도자들이 말한 21세기 유럽의 성장론은 나름 신선하게 다가오기는 했다. 작년에 브렉시트에 빠져 한동안 유럽연합만 파고든지라 지금까지 유럽 내 극우 세력의 위협만이 머리 속에 가득 차있었는데, 최근 유럽의 주요 선거에서 극우 세력의 득세를 저지했다는 점이 환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로존의 성장과 단순한 선거 득세만으로 유럽 연합이 보다 큰 영향력, 즉 패권적 지위를 가질 것이라는 전망은 과연 타당한 것인지, 단순한 그들의 바램인지 의구심이 간다. 유럽연합의 미국 경제성장률 추월과 극우 정당 득세 실패는 유럽 내 경제 문제나 정치 사회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브렉시트로 가속화되었던 유럽 연합의 균열 조짐은 유럽 연합 내 비민주적 의사 결정 구조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참고로 내가 갖고 있는 유럽연합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독일의 정치학자 클라우스 오페의 이론을 따른다.) 유럽 연합의 핵심 기구에는 유럽 이사회, EU 각료회의, 유럽 의회, 유럽 집행 위원회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유럽 연합 시민들의 대리인으로 선출된 기구는 '유럽 의회'이지만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입법 기구는 각국의 관료들이 모인 'EU 각료회의'이다. 그리고 유럽연합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권력 불균형에서 기인한 왜곡된 '본인-대리인'의 관계이다.
대의민주주의 모델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리인이 유권자에 의해 본인이 속한 영토의 유권자들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아 대표로 위임된 다음, 유권자들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다음 선거를 통해 심판을 받는다. 허나 유럽연합의 법률 발의권을 갖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는 '유럽 집행 위원'들은 그들이 속하는 영토의 시민들에게 집단적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 되려 전체 유럽 연합으로부터 대표를 위임 받고 권한을 부여받은 '유럽 의회'는 유럽 시민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는 반면 그들을 위해 행동할 것을 약속하지 않은 '유럽 집행 위원'들은 어떠한 정치적인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다.
유럽이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이사회 회원들 각자가 총리직 등에 선출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유럽연합이 아니라 각자 국가를 위해 복무하도록 위임받은 것이다. 이는 유럽이사회의 민주적 정당성을 제약한다. 국가의 유권자들은 자신의 대리인으로 정부를 선출했는데, 그 정부의 우두머리가 본인의 영토적 영역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을 할 자격을 부여받는 셈이다. 유권자는 자신을 대표하도록 그 대리인에게 권한을 주지도 않았고, 제재를 가하여 그 대리인의 권한을 박탈시킬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지도 못한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유럽 집행 위원회와 유럽이사회 뿐만이 아니라 정치색을 없앤 비정치화된 수탁 기구 모두에 해당한다.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유럽연합의 기구가 바로 민주적 책임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수탁 기구'들인 것이 회원국들의 국가적 정체성 상실을 일으킨 주범이다.
위와 같은 민주적 결함에서 발생한 회원국들의 국가적 정체성 상실이 영국 내 이민자 문제, 분담금 문제, 유럽 내 영국의 발언권 문제 등 브렉시트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대다수 문제들을 만든 근원이다. 유럽연합 내 각국의 권한 불균형과 국민들의 국민적 정체성 상실이 브렉시트는 물론 브렉시트 이후 제기된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탈퇴 움직임, 그리고 각종 민족주의 노선의 기저 또한 이룬다고 생각한다. 최근 극우 정당의 득세 실패와 함께 새로 들어선 행정부나 입법부가 추진력을 보이며 극우적 움직임이 다소 움추러들기는 했다. 하지만 이에 가려져 오늘 ALC 세션에서 작년 유럽 연합 위기의 근본에 대한 언급은 없이 미국 쇠퇴에 따른 유럽 연합의 긍정적 전망만이 논의됐던 것은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유럽연합이 새로운 통합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국제 무대에서 패권적 지위를 획득하려면 대외적인 요소로 확장성을 넓히기에 앞서, 진정한 통합을 방해하고 언제든지 위협 요소로 떠오를 수 있는 유럽 연합 내부의 문제와 이로부터 발생한 극우 민족주의 노선의 확장에 대한 해결을 우선시 해야 할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유럽 연합 쪽으로만 많이 치우쳤는데, 미국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있을 세션을 들은 후에 추가적으로 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