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로 소풍나간 아이들
일주일 내내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정치인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오르내리고 있다. 그동안 정치인이 이슈가 되면 "또 무슨 사고를 쳤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곤 했는데 이번은 다르다. "이 의원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라는 물으며 검색어를 클릭한다.
필리버스터
워낙 뜨거운 이슈인지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기는 했을 것이다. 포털의 기사 댓글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의 인터넷 여론은 굉장히 뜨겁고, 아침 라디오나 팟캐스트에도 매일 보도된다. 종편 채널에서도 신나게 보도하고 있으나 JTBC를 제외하곤 모두 극 편향된 지라 제대로 보도하는 곳은 없다. 언론이기를 포기한 듯한 지상파 3사의 저녁 뉴스는 여야 간의 갈등이나 이해관계, 혹은 시간 기록만을 보도하며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의의는 관심 밖이다.
좋은 보도든, 그렇지 못한 보도든 스쳐 지나가며 그냥 들어보기만 했을 뿐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원래 국회 본회의에서 의원들의 발언에는 시간제한이 있다. '필리버스터'는 이러한 시간제한을 없애 의원들이 무제한으로 발언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다수당이 '다수'의 횡포로 법안을 처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수당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말 그대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도록 회의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다.
지금은 일명 '테러방지법'이라고 불리는 '국민 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이란 법안의 통과를 막기 위해 진행되고 있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여야의 협상이 결렬되자 국회의장은 현 대한민국을 갑자기 '국가 비상사태'라고 선포하며 '직권상정'이란 극단적인 카드를 꺼냈다. 국회의장의 말도 안 되는 집권상정에 대해 반발하고, 테러방지법에서 문제가 되는 일부 '독소 조항'을 수정하고자 야당에서 꺼낸 카드가 바로 필리버스터이다.
현재 여당은 필리버스터의 진행을 '국회 마비'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테러방지법'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고수하고 있고, 야당에서는 이러한 여당에게 '테러방지법'의 중재안에 대한 협상을 요구하는 한편 유례없던 야당 긍정 여론에 힘입어 필리버스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여당 의원들과 대통령님께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이라 비판하고 있는 필리버스터 제도는 2012년 여당의 총선 공약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잘 아는 척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필리버스터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이종걸 원내대표의 필리버스터 시행 발표 이후이다. 물론 요즘 나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끄는 인물 중 하나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필리버스터란 것을 8시간 동안 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지난 월요일에야 찾아보게 되었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진행된 '필리버스터'란 소재로 쓸 수 있는 글의 종류는 매거진 하나를 새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수도 없이 많다. 필리버스터를 이어가고 있는 2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한 발언들만 봐도 모두 테러방지법의 위험성과 직권상정의 부당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의원 별로 테러방지법안, 언론 보도, 북한, 전 세계의 테러, 헌법 가치, 유신 정권, 국정원과 안기부,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 자유민주주의 등 조금씩 다른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제레미 벤담이 제시한 '판옵티콘'에 대한 강연(?)도 들을 수 있었다. (참고: http://www.filibuster.today )
필리버스터나 테러방지법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 국회에서 국회의원들께서 잘 이야기해 주시고 계시니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를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필리버스터로 쓸 수 있는 수많은 소재 중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은 필리버스터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 그중에서도 '청소년'들의 작은 움직임이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되고 나서 온라인 상에선 그 열기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고, 오프라인까지 열기가 퍼져 국회 방청 신청이 평소의 몇 배로 늘었다고 한다. 시민들이 의원실이나 정당의 사무실을 통해 끊임없이 방청을 신청하고 있고, 이는 국회 본회의장보다 방청석에 더 사람이 많은 진풍경까지 자아냈다.
필리버스터에 대해 청소년들이 처음 보인 움직임은 바로 이 '국회 방청'이다. 국회 방청 열풍이 시작된 이후로 방청석에 어려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청소년들의 참여가 부각된 것은 정의당 서기호 의원의 필리버스터 중이었다.
유튜브로 필리버스터 중계를 보고 있었는데 의장석에 앉아 계시던 이석현 국회 부의장께서 갑자기 서기호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끊고 발언했다.
"잠깐만 소개한다. 지금 방청석에 많은 학생들이 들어와 있다."
이 말에 이어 전북과 부산에서 각각 140여 명, 8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방청석에 앉아있다고 소개, 국회 제도에 대해 잘 보고 가라는 말과 함께 환영의 말을 건넸다. 이에 따라 필리버스터를 진행 중이던 서기호 의원도 그들에게 환영의 말을 건넸고 학생들은 이에 손인사로 화답했다.
유튜브로 필리버스터 중계를 보고 있던 나를 포함한 네티즌, 트위터리안들은 매우 놀랐다. 개인도 아니라 학생들이 단체로, 수도권도 아니라 지방에서 단체로 국회를 찾아오다니. 생중계를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선 그들의 선생님이 부럽다는 말도 나왔고, 지방의 학생들도 저리 관심이 있는데 자신도 직접 국회에 가서 방청해야겠다는 말도 적지 않게 나왔다.
학생들을 필리버스터에 데리고 온 국사 교사는 어떻게 국회에 오게 되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이들이 테러방지법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주고 필리버스터 제도의 장점도 직접 눈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응했다. 필리버스터를 직접 눈 앞에서 보게 된 학생들도 테러방지법이 어디서 문제가 되는지, 왜 일반 시민들에게도 위험이 있을 수 있는지 알게 되어 친구들에게 더 잘 설명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
원래 정치에 관심이 있던 이들은 당연히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는 사안이고,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처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청소년도 많이 볼 수 있다. 정청래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방청한 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은 뉴스 1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에서 유튜브로 필리버스터를 시청하다 국회에 직접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필리버스터 때문에 난생처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의원들도 없는데 혼자 말하고 있는 정 의원이 감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꼭 직접 가서 방청한 이들 뿐만이 아니라, 온라인 중계를 통해 본 청소년들도 필리버스터를 통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처음 갖거나, 혹은 더 많아진 듯하다. 일례로 10대가 대부분인 내 트위터 타임라인만 봐도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는 한편 (내 트위터 친구는 연예인 팬이 대부분), '필리버스터'란 단어에 대한 검색 기록만 봐도 젊은 층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국회까지 발을 뻗었다.
시민들이 보낸 트위터 메시지와 더민주 홈페이지 게시판의 글도 토론 발언에 포함됐다. 김현 의원은 "기다릴 것 같아 읽겠다"면서 자신에게 직접 트위터 메시지를 보낸 17살 청소년의 편지글 전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아래는 그 메시지를 일부 정리한 것이다.
"저는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흔히 꽃다운 나이라 불리는 17세다. 진로가 아니라 나라꼴을 걱정하다니, 어이가 없다. 전 게임하는 게 행복하다. (테러방지법 통과로) 국정원이 왜 제 게임 취향을 알아야 하는지, 제 사생활을 왜 밝혀야 하는지 모르겠다. 대통령 이름만 언급해도 잡혀가는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 오마이뉴스
학생들의 국회 참관이나 위의 편지와 같은 청소년들의 참여 모습이 중계되자 채팅창에서 자신이 학생임을 밝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내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간단 정리'란 장문의 글의 평소보다 많은 반응이 있었다. 지금까지 굉장히 지엽적인 사례만 들었지만, 무엇보다 네이버와 다음의 실시간 검색어에서 끊임없이 오르고 내리고 있으니 아마 조금이라도 관심이 올라갔을 것이다. 그렇길 바란다.
청소년들은 방청이나 단순한 관심을 넘어 직접 '시민 필리버스터'에 참가하기도 했다.
국회에서 의원들이 필리버스터를 이어갈 동안 국회 정문 앞에서 참여 연대의 주관으로 '시민 필리버스터'가 이어지고 있다. '시민'이란 단어가 붙었지만, 초반에는 거의 몇몇 시민 단체나 인권단체, 그리고 소수 정당인이나 아직 의원직에 오르지 못한 정치 신인들만이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점점 필리버스터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커지자 단순히 정치 세력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까지 그 영향이 확대되고 있다. 길을 지나가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국회에 방청을 가다가 들리는 사람도 있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얻은 지식이나 기존의 배경 지식으로 즉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의원들처럼 관련 자료나 원고까지 직접 준비해 와서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청소년'도 있었다.
물론 전체 참가자들 중 청소년 참가자들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SNS를 통해서 청소년들의 시민 필리버스터 참여 사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을 보아하니 한두 명이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청소년 단체에 함께 소속되어 있는 내 지인도 이 '시민 필리버스터'에 참가하였다. 그의 필리버스터 영상을 보며 난 시간이 되지 않아 가지 못해 많이 아쉽기도 했고, 밤새워 원고를 써서 직접 참가한 그의 용기와 의지가 부럽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시민 필리버스터에 동참하게 된 00 고등학교 0학년 000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국회의장님의 직권상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23일 국가 비상사태로 판단하시며 이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셨습니다... (중략)... 법이라 함은 모든 국민과 관련된 것입니다. 정치라 함은 우리의 생활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무관심이 아닌 지속적인 토론과 의견이 일상생활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후략)
출처 : 채플린의 브런치 https://brunch.co.kr/@eric083/3
요즘만큼 일반 대중들이 '정치'란 것에 대해 친숙함을 느끼고,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 의지를 보여준 일은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전혀 없었다. 국회방송의 인터넷 생중계,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양질의 연설이 이에 큰 역할을 한 듯하다. '무제한'이란 시간적 장점을 활용해 누가 들어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 의원들에 감사하다.
청소년들의 관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아직 '정치'라면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아 평소에 정치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요즘은 약간 다르다. 국회가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틈을 타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심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이에 대해 설명해주고 홍보하는 중이다.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커진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또 싹트기 시작한 청소년들의 관심이 반드시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이 관심에 대한 보답도 잘 해주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