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몽마르트르
미술관도 좋고 빈티지숍도 좋지만 파리는 목적지 없이 걸을 때 가장 아름답다. 거리 구석구석을 살피다 공원이 주는 쉼을 감사히 만끽하면 된다. 그늘과 벤치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다. 햇빛이 쏟아져도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이유다. 반나절의 산책으로 기억에 새긴 파리의 진면모를 나누고 싶다.
"음악이 사람을 이렇게나 기분 좋게 해주는 거였나?" 작은 공원에서 연주하는 아마추어 밴드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50대에서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연주자들이 귤색 스카프를 두르고 호흡을 맞춘다. 지휘자의 손짓을 놓치지 않겠다는 매서운 눈빛. 이 진실한 생활음악인들은 악보를 한음한음 곱씹고, 음계를 꾹꾹 눌러 하모니를 만든다.
햇빛 아래에서 이들의 서툰 연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평가하지 않는다. 새어 나오는 행복감을 입가에 묻히고 가만 선율에 젖을 뿐이다.
그 옆에선 아이들이 모래 놀이에 한창이다. 음악회를 보는 여행객과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교차한다. 나는 놀이터 주위를 둘러싼 벤치에 앉아 연주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의 고사리손에 매료되었다 한다.
공원 정중앙 목재 탁구대에서 펼쳐지는 접전도 흥미진진하다. 음악회에 스포츠 경기까지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눈앞에 있다. 나무로 둘러싸인 흙 위에 울타리, 정자, 벤치 몇 개로 만들어낸 활기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다보니 또 다른 공원에 다다른다. 이 공원엔 잔디뿐이다. 분수도 조각상도 없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흙길이 공간 디자인의 전부다. 그런데 여긴 가족도 있고, 연인도 있고, 친구들도 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드러눕고 웃통을 벗는다. 책을 읽거나 와인 한잔 홀짝이면서 내 집 정원인양 나른하게 늘어진다. 한강공원의 100분의 1도 안돼 보이는 크기에 100m 간격으로 빼곡하게 사람이 들어찼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늘 아래라면 한숨 자면 되고, 그늘 밖이면 일광욕을 즐기면 된다. 방해꾼은 없다.
파리 사람들은 이런 밀도에 익숙하다. 카페에서도 이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는다. 카페 밖 야외석에는 잡지 하나 놓일까 말까 한 원형 테이블이 빈틈없이 늘어서 있고, 그 테이블 양쪽을 따라 의자들도 나란히 어깨를 맞댄다. 한국 기준으로는 일행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정도가 아니라, 일행이라고 확신이 들 정도의 거리에 앉아 각자 커피를 주문한다.
옆 테이블 손님과 눈을 너무 자주 마주치는 것 같으면 이야기꽃을 펼쳐보면 된다. 커피 마실 시간이 있는데 이야기할 시간이 없겠는가!
출출해지면 햄과 치즈, 크레페의 냄새를 쫓아 걷는다. 어쩌다보니 해산물을 파는 시장통에 들어선다. 거기서 오이스터 바를 만난다. 한껏 꾸민 두 여자가 이제 막 석화 한 접시와 샴페인 한 잔씩을 비웠다. 나는 이끌린 듯 비린내를 들이쉬며 한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손질된 석화 6개가 둥그런 접시에 담겨 나온다. 레몬즙을 쭉 짜서 둘러주고 꼬마 나무포크로 흐느적거리는 내용물을 집어 입에 넣는다. 돌이 씹히진 않을까 긴장하며 오물거린다... 눈 깜짝할 새 껍데기 6개만 남는다.
맛있는 걸 먹고 나선 역시 다시 걸어줘야 한다. 이번엔 몽마르트르 언덕에 가보기로 한다. 언덕 꼭대기에 동화처럼 자리 잡은 성당이 있다. 성당으로 가는 계단 입구에는 기념품 상인들이 촘촘하게 돗자리를 깔았다. 형형색색의 에펠탑 액세서리들이 10년 전과 똑같아 보인다. 관광객에게 팔찌를 채우며 강매하는 수법까지 10년 전과 똑같다. 같은 사람이 장기 근속 중인 건지, 인력난이 없을 정도로 인기 있는 직종인 건지 모르겠다.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변함 없이 그대로 있어준 게 반갑다.
경사진 언덕에 띄엄띄엄 앉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언덕 뒤쪽으로 해가 지면서 천천히 그림자가 드리운다. 인기 없는 영화를 상영하는 상영관이 떠오른다. 사실 영화 보러온 게 아니라 지금 옆에 있는 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다고 얘기하듯, 사람들은 들뜬 표정으로 대화한다. 노을이 진 후엔 또 다른 얘깃거리가 떠오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