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어른의 백패킹 | 뉴질랜드 남섬

Kepler Track : Iris Burn - Luxmore

by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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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예약, 옷 준비


지난 3월, 퇴사를 결정하자마자 12월 뉴질랜드 트레킹을 (머릿속으로만) 계획했다. 지난 키르기스스탄 트레킹 당시 동행자한테 '황제 트레킹'이라는 얘기를 들어 편안한 트랙을 예상했다. 황제라니 듣기만 해도... 4월에 오클랜드행 비행기 표를 샀고, 7월에 케플러 트랙(Kepler Track)을 2박 3일로 예약했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황제 트레킹은 아니었다.


일단 예약이 좀 늦은 편이었다. 뉴질랜드 그레이트 워크(Great Walk) 사이트(https://www.doc.govt.nz/parks-and-recreation/things-to-do/walking-and-tramping)에서 트랙을 예약하려고 보니, 인기 트랙인 밀포드 트랙(Milford Track)은 이미 자리가 없었다. (사실 인기 트랙이 어딘지도 7월에야 알아봤다.) 케플러 트랙도 정방향(Luxmore - Iris Burn)으로는 예약이 꽉 차 방향(Iris Burn - Luxmore)으로 예약해야 했다. 심지어 아이리시 번(Iris Burn) 산장(Hut)은 풀 북, 결국 여긴 캠프 사이트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배낭이 아주 많이 무거워질 거란 뜻이었다. 텐트에 매트에 의자에... 준비 단계부터 삐그덕댔다.


사진1. 노스페이스 패딩 ㅎㅎ (입은 사람은 남편임. 패딩 주인도 남편임. 장소는 이탈리아 돌로미티. 뉴질랜드 아님.)

그래도 여름이니 짐이 그렇게 무겁진 않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보를 보니 기온이 8도에서 16도였다. 밤에 8도면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겐 패딩이 필요한 날씨였다. 그래서 패딩을 가져갔다. 그르니까 사진 속 바로 이 패딩(사진1)... 진짜 이 패딩... 그리고 우모 바지도 챙겼다. 우모 부츠도 뉴질랜드에 가져가긴 했는데 실제 트랙에 가져가진 않았다. + 핫팩이랑 장갑까지.


미드레이어로는 케일(Cayl) 알파 풀오버, 베이스 레이어는 긴팔 오들로(Odlo) 반팔 제시믹스였다. 바지는 블랙다이아몬드, 안쪽에 제시믹스 반바지를 겹쳐 입었다. 블랙다이아몬드 바지는 강풍을 잘 막아주기는 하는데 방수가 안되서리 좀 아쉬웠다. 매우 얇아서 쌀쌀한 날씨엔 엉덩이에 한겹 더 입어줘야 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비 예보였다. 일단 케일 방수 자켓(shield air jacket)은 샀고, 바지는 방수가 아니어서 지난 트레킹용으로 사놓았던 우비를 챙겼다. 배낭까지 가려주는 빅 사이즈 우비인데 색이 너무 우중충해서 사진은 이쁘게 안 나온다. 그리고 배낭을 우비로 가리면 모양이 웃기다. 배낭도 한층 더 커보이고... 이 외에는 신발도 새로 장만했다. 아크테릭스 에어리어스 아우라 블랙인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 쓴 아이템이다. 접지력이 좋고 발이 안에서 놀지 않아 발가락이 덜 아프다. 방수도 잘 되는 편이긴 한데 위로 들어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레인보우 리치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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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트랙 헤드(TLC 포인트) 주차장에서 셔틀 버스를 기다렸다. tracknet이 공식 버스 회사인 듯.

케플러 트랙에는 트랙 입구(Track Head)라고 할 만한 곳이 두 군데 있다. 우리는 그중 레인보우 리치(Rainbow Reach) 포인트를 선택했고, TLC(Te Anau Lake Control) 포인트를 종료 지점으로 정했다. 그러려면 차를 TLC 주차장에 대놓고 셔틀을 타고 레인보우 리치로 이동해야 했다. TLC에서 레인보우 리치로 가는 버스(https://www.tracknet.net/)를 예약했다.


쏟아지는 비... 9시 40분 도착 예정이던 버스가 47분 쯤에 와서 좀 쫄리긴 했지만 큰 문제 없이 레인보우 리치로 갈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역방향이다 보니 해당 구간에 버스를 타고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시작 지점과 종료 지점을 다르게 정하는 경우도 드문 듯 하다.


트랙 시작! 하기 전에 일단 화장실부터 들렀는데 푸세식이라 고통스러웠다. 날파리와 홍어 냄새 때문에 지난 후쿠오카 보가츠루 백패킹이 떠올랐다. 생리를 미루려고 한국에서부터 피임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어 트레킹 전날부터 생리를 시작한 상태였다. 내가 잘못 산건지 뭔지 뉴질랜드 탐폰은 손가락을 좀 많이 사용해야 하는 형태여서 위생적으로 걱정이 많았다. 물티슈에 탐폰, 라이너, 이것저것 챙겨서 별 거치대 없는 푸세식 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하니 좀 많이 힘들었다. 앞으로가 걱정됐다.


전날까지 남편은 그냥 럭스모어 산장 왕복으로 1박 하면 어떠냐고 했는데 뉴질랜드까지 11시간 걸려 온 게 너무 아까워서 강행... 어쨌든 후회는 없다.

643A0EA4-4EB0-4887-A4D6-108485DABEE0_1_201_a.jpeg 뉴질랜드는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도 해가 비친다. 정말 요상한 날씨다.

온 인상을 찡그리면서 화장실을 나왔지만, 일단 얼굴을 피고 첫 발을 디뎠다. 남섬 도착 다음날 후커밸리 트랙(왕복 3시간 트랙)을 들렀다가 신발과 바지 밑단부터 무릎 바로 아래까지 다 젖는 경험을 한 터라 급히 게이터(gaiter)까지 사 신었다. 게이터는 높이가 발목 조금 위까지 밖에 안와서 바지가 비에 젖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해소해주진 않았다. 바지에 진흙이 덜 튀고 어느 정도 비를 막아주는 건 사실이지만 무겁고 불편했다. 또 트랙 초입은 주로 숲이어서 나무가 비를 거의 막아줬다. 그래서 게이터는 조금 신다가 벗어 버렸다. 남편의 경우는 계속 신고 있었다. 신발 젖는 걸 무척이나 싫어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려고 그랬다.


아이리스 번 산장까지 가는 길은 숲보단 정글 같다고 해야 할까. 가장 원시적인 식물이라는 양치식물, 그리고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구글 지도에 케틀 레이크(kettle lake)라고 표시돼 있는 곳에는 주황색 이끼인지 뭔지가 연못을 채웠다. 덩굴 형태의 기생식물들이 나뭇가지에 걸쳐진 모습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는데, 나무를 자세히 보니 새하얗게 빛을 바랜 것이 기생식물이 흡혈귀처럼 느껴졌다. 생명을 앗아가는 식물인 것 같다. 관리가 되고 있는 거 맞겠지? 늪지대, 진흙, 습지, 이런 단어들이 케플러 트랙을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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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케플러 트랙의 식물들. 그리고 우비를 배낭까지 덮어 써서 웃긴 모양이 된 남편.

1시간 30분 정도 평지를 걷고 나니 모투라우 산장(Moturau Hut)이 나왔다. 우리의 첫 번째 거점이었다. 뭐든지 처음이 힘든 법이라 이 1시간 30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광경을 천천히 눈에 담느라 늦어지기도 한 것 같다. 산장에는 진흙 묻은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없다. 비 묻은 겉옷도 마찬가지. 우린 주섬 주섬 우비를 벗고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우리 둘 모두 가벼운 살로몬 신발을 챙겨 갔다.


모투라우 산장은 별로 묶는 사람이 없는지 테이블 의자가 모두 테이블 위로 정리돼 있었다. 이미 한 팀이 자리를 잡고 잠시 몸을 녹이는 중인 것 같았고, 우리도 의자를 하나 내려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끓여서 드세요"라고 안내가 되어 있는 개수대, 그리고 이런 저런 트랙 안내. 누가 적었는지 화이트보드에 날씨도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바로 옆에 레인저들의 헛이 따로 있었다. 형광색 장비들이 곳곳에 보이는 것이 구조 활동도 같이 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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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투라우 산장(Moturau Hut)

마트에서 산 김치 사발면, 스리랑카식 커리 간편식에 각각 물을 부어서 뒤적뒤적. 간편식은 물을 넣고 1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둘다 향이 워낙 세서 산장에 같이 있는 분들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이때가 12시 30분 쯤이었고 한창 배가 고플 때여서 스니커즈도 먹어줬다. 짐을 줄이려다 보니 식량을 딱 맞게 가져와서 걱정이 조금 되긴 했다. 간편식을 두어개 더 가져왔으면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 그치만 간편식은 솔직히 맛이 없어서... 저 커리도 잘 섞지를 못해서 그런지 가루 맛이 많이 났다. 맛 없는 걸로 배불리 먹으면 또 기분 나쁘니까... 남편의 이번 트레킹 원픽 음식은 김치 사발면이었다.



샌드플라이, 그리고 케아


적당히 배를 채우고 다시 걸었다. 킨더 초콜릿, 하리보 젤리, 캐러멜, 하이츄를 행동식(?)으로 챙겨와서 하나씩 까먹으며 다녔다. 에너지 젤도 중간에 섭취해줬는데, 설명서를 보니 운동 15분 전에 한 포 먹고 운동 중에 30분에 1번씩 계속 먹으라고 되어 있었다. 트레일 러닝을 하는 사람들을 중간 중간 마주쳤는데 손에 한 포씩 쥐고 있긴 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알맞는 행동식인 것 같다. 그래도 플라시보인지 모르겠지만 힘이 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럼 된 것 같기도.


고난과 역경은 로키 포인트 쉘터(Rocky Point Shelter)에서 우리에게 찾아왔다. 산장에서 3시간 넘게 걸은 시점이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잠시 짐을 내려놨다. 그런데 달라 붙기 시작한 샌드플라이(sandfly). 모기와 유사한 흡혈 곤충인데 피부를 물어 뜯는다고 한다. 악마도 이런 악마가 없다. 닿자 마자 따끔해서 후하고 입바람을 불면 꿈쩍도 안한다. 거의 뽀뽀하다시피 가까이서 불면 그제서야 꽁무니를 뺀다. 아니면 털어내거나. 아마도 털어내는 힘으로는 샌드플라이를 죽이게 되는 것 같다. 근데 이게 한 두마리도 아니고 끊임 없이 나타나서 도저히 앉아서 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모기보다 짜증나는 곤충은 처음이다. 딱히 윙 소리도 안나서 가까이 왔는지 파악하기도 힘들다.


샌드플라이한테 공격 당하는 중

결국 엉덩이 한번 못 붙이고 쉘터를 뒤로 했다. 아직 한참 남았으니 서둘러야 되기도 했다. 마지막 루트가 오르막이라는 걸 감안하면 로키 포인트 쉘터가 아이리스 번까지 가는 트랙의 딱 중간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 샌드플라이들아, 너네 때문에 도망가는 거 아니구, 바빠서 간다.


이번 트레킹에서 남편이 야심차게 준비한 게 있는데 바로 정수필터(Katadyn BeFree)다. 뚜껑 안에 솔 같은 게 촘촘하게 박혀서, 그 안에 냇물을 담아 뚜껑을 닫고 부으면 정수물이 나오는 구조다. 트레킹 할 때 물이 가장 무겁다보니 남편은 여행 내내 이 아이템을 가장 뿌듯해 했다. 중간에 좀 깨끗해 보이는 계곡물이 나오면 남편은 필터를 들이댔다.


나는 필터를 거쳐 나오는 물도 좀 찝찝하긴 해서, 필터 + 끓인 물을 마셨다. 산장에 준비된 물들도 다 빗물이거나 정수 안된 물이어서 같은 방식(이중 필터링!)으로 마셨다. 다만 좀 귀찮긴 하고, 또 그렇게 한다고 완전히 정수가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끓이고 나서도 물에 살짝 기름이 떠 있는 느낌. 그래도 다행히 우리 둘 다 여행 기간 배탈은 안 났다. 물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아이리스 번 산장에는 저녁 6시 30분쯤 도착했다. 산장 시설은 캠프장 이용객이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화장실을 슬쩍 보니 산장은 수세식이고 캠프장은 푸세식. 돈이 없어서 예약을 못한 것도 아니고 화장실 가지고 차별하니까 너무 기분이 안 좋았다. 생리 때문에 너무 힘들기도 하고, 그냥 산장 화장실 몰래 썼다. 수세식 화장실에는 생리대를 버릴 수 있는 휴지통도 있다. 벌금을 내고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날에는 푸세식을 썼는데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최소한 트랙 헤드에 있던 화장실보다는 냄새가 괜찮았다. 청소를 열심히 하긴 하는 것 같다. 아니면 아침이라 갓 청소한 뒤여서 괜찮은 걸 수도.)


산장과 캠프장은 걸어서 3분 정도 걸린다. 캠프장에는 평평한 공간이 몇 군데 있고, 캠프 파이어가 가능한 공간도 있었다. 누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건지, 여러명이 와서 불을 함께 사용한 것이 그런 모양으로 남은 건지는 모르겠다. 실제 누군가 그걸 이용하는 건 못 봤다.


캠프장에서 떠날 채비를 하던 한 하이커는 샌드플라이를 조심하라고 경고해줬다. 꼭 문을 닫고 다니라고. 또 캠프장 개수대가 있는 이곳 저곳에 케아(kea)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엄청나게 많았다. 곤충에 더해 이제는 새까지 괴롭힌다. 케아는 토끼 크기 만한 앵무새인데,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절대 케아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면서 텐트를 뜯는다느니 음식을 뺏어간다느니, 무섭게도 경고를 해댔다. 얘넨 웃기게도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케아를 실제로 목격하면 귀엽겠다라는 거였다. 그리고 텐트 뜯기는 건 뭐, 내가 막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단 텐트 밖에 뭘 안 두면 되겠지 하고 텐트 필 곳을 찾았다.


이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못한 채...


처음엔 나무가 없고 강물과 가까운 곳에 텐트를 피려다가(모르긴 몰라도 샌드플라이가 조금이라도 덜 나올 것 같았다), 어떤 짐승의 것인지는 몰라도 X이 엄청난 밀도로 분포되어 있어 다시 숲으로 향했다. 뒤늦게 숲 속에 텐트를 피려니까 이미 두 팀이 텐트를 펴두고 있어서 최고의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런데로 괜찮은 평지에 텐트를 폈다. 바닥은 축축한 편이었고, 나무 뿌리가 군데 군데 튀어나와 있어서 그리 편안한 잠자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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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놈의 샌드플라이가 또 다시 출몰해서 온 텐트를 휘저었다. 순식간에 텐트 문을 닫는 데도 끝도 없이 들어왔다. 그와중에 다행히 샌드플라이는 모기보다 둔한 편이어서 적당한 속도로 위에서 눌러주면 잡기가 쉬웠다. 일단 실내 샌드플라이를 싹 정리(?)하고 고기를 구웠다. 저녁은 소고기와 까르보나라. 든든하게 먹었지만, 텐트에 고기 냄새가 잔뜩 밴 것이 한 밤 케아의 습격을 유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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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우린 푹 자고 일어났다. 고요했고, 한없이 어두워서 잠 깰 일이 없었다. 거의 10시가 다 돼서 눈을 떴다. 그리고 처참한 광경(사진2)을 목격했다. 어제 출발하면서, 그리고 아이리스 번 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내일 라면 먹을 생각에 너무 설렌다"고 얘기했었는데, 바로 그 라면이 뜯어진 채 텐트 밖에 있었다. 정말이지 충격과 공포였다. 라면을 먹을거였다면 다 먹기라도 할 것이지, 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텐트에 구멍까지 뚫어가며 신라면을 뽀려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소중한 신라면 두 봉지는 그렇게 생명을 다했다.


그리고 텐트는...다행히 구멍은 크지 않았지만, 케아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AS 가능하겠지... 범행 현장에 케아는 없었고, 그저 작은 참새만이 이게 웬 횡재냐며 라면을 쪼아대고 있었다.


케아는 신라면 뿐만 아니라 세면도구를 담아 놓은 봉지도 텐트에서 가지고 나와 구멍을 내고 내용물을 탐구(?)했다. 호기심 많다는 긍정적인 표현을 생각해낸 뉴질랜드 사람들이 정말이지 놀랍다. 케아는 정말 호기심만 많아서 뭐든 건드려 놓기만 하고 금새 관심이 식어버리는 것 같다.

텐트에 난 구멍. 그리고 라면 한 알...

그래도 확실히 안 것이 케아는 꽤 큰 새구나, 라는 거였다. 저걸 다 꺼낼 정도면 힘도 세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라면을 빠르게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주섬 주섬 이제는 쓰레기가 된 신라면을 챙겨 쓰레기 봉투에 넣고, 샌드플라이와의 전쟁을 벌이며 텐트를 정리했다. 샌드플라이와 케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뉴질랜드의 생명체들이다.


텐트를 말리고 있는데 산장을 관리하는 레인저가 나타나서는 또 한 바탕 핀잔을 늘어놨다. 알고보니 우리 텐트만 공격 당했다. 그녀는 "이렇게 다 경고를 써놓지 않았느냐"며 몇 번이고 본인이 써 놓은 문구들을 읊었다. 저도 봤어요... 봤다고요... 설마 봉지 안에 있는 라면 냄새를 맡고 텐트를 뜯을줄 몰랐죠... 고기 냄새 때문에 우리 텐트만 공격했을까? 라면을 가방에 넣어놨으면 가방도 뚫렸을까? 이제는 그게 궁금하다.


나중에 산장을 좀 돌아보니 캠퍼들을 위한 창고(?) 같은 것이 있기는 했다. 아마도 거기 식량을 보관하라는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쨌든 텐트 안에 음식을 넣어두면 안된다고 했으니 뭔가 보관한 장소가 있긴 하다는 얘기 같다. 누군가 케플러 트랙에 가게 된다면 꼭 참고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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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젖은 텐트 말리기. 그리고 공포의 샌드플라이, 이제 보니 머리에 많이 몰렸네.
제목 없음 - 2024년 12월 19일 16.17.jpg kea, sandfly 말고도 케플러 트랙엔 명물이 있다. 바로 키위새. 키위새를 못 본 이야기.


케플러 트랙의 절정


오늘은 좀 일찍 나서보자, 라고 결심했으나 12시 조금 넘어서까지 캠핑장을 나서지 못했다. 다행히 예보와는 다르게 해가 떠서 텐트도 빠르게 말렸지만, 아침으로 포테이토 베이컨 스프를 끓여먹고 정수물도 좀 보충하고 하다보니 우리답게 계획은 틀어졌다. 그리고 당연히 좀 다투기도 했고. 스프는 맛있었지만, 샌드플라이한테서 도망다니느라고 덜 익히는 바람에 가루 반 스프 반으로 먹어야했다. X도 안 밟도록 조심해야 되고. 그 와중에 산장에 묵던 여자 3명이 하의 실종 패션으로 강을 향해 갔다. 몸을 씻으러 간 것 같다. 이 추위에... 정말 대단. 하긴 산장에서 묵었으면 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으려나.


12시 30분쯤 캠핑장에서 출발했다. 땀이 많은 남편은 구름이 사라지자 바로 땀을 뻘뻘 흘렸다. 4살 조카가 나중에 남편 땀 흘리는 영상을 보더니 "수영장 간 거야?"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날씨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과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 얇은 줄기로 떨어지는 폭포, 그리고 새 소리. 내가 좋아하는 것들 천지였다. 그러다 나무 그늘조차 사라졌을 때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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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가 케플러 트랙이라고 구글에 검색하면 흔히 나오는 풍경들의 연속이었다. 길게 늘어선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트랙. 오르막도, 내리막도 있지만 경사가 가파르지는 않고 계단은 간격이 다소 넓다. 다만 길은 좁은데 바람이 많이 불어 걷는 동안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강풍 수준이 아니고 폭풍이 몰아치는 수준으로 바람이 불어서 잠깐 방심하면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내 허약한 다리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이날은 시야가 맑아서 산맥 저 끝이 보였고, 그 광활함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역방향으로 걷다보니 누군가 추월하는 것도 없어서 마음만은 편했다. 멀리 보이는 이 곳보다 높은 산에는 흰눈이 녹지 못한채 남아 있었다. 하염없이 걷기에 부족함 없는 풍경이었다.


오후 3시 조금 넘어 도착한 행잉 밸리 쉘터(Hanging Valley Shelter에서, 마침내 원수와 마주했다! 생각보다 꽤 커서 쫄긴 했지만 당당하게 다가가 "너 이놈 시키!"라고 혼쭐을 내줬다. 물론 같은 놈은 아니겠지만. 케아는 아마도 쌍으로 다니는 것 같다. 그 이후로도 케아는 계속해서 목격됐다. 비가 올 때는 어디 숨어지내는 것 같기도 하고... 날씨가 좋아서 모습을 드러냈나 싶었다. 생각보다 크고, 미워할 수 없는 생명체였다.


또 케아한테 삥뜯길까, 오두막 안에 들어가 영양을 보충했다. 케아가 뺏어간 한 끼 식사 때문에 가진 식량을 배분하다보니 쉘터에서는 마트에서 사간 대구 간 통조림, 그리고 육포를 먹어야 했다. 당연히 충분하진 않았지만, 내일까지 트레킹을 이어가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 말로는 대구 간 통조림에 기름이 무척이나 많아서 칼로리가 높다고 한다. 그걸로 위안을 얻기로 했다.


오후 5시 포레스트 번 쉘터(Forest Burn Shelter)를 지난 뒤로는 식물이 더 많이 줄었다. 이제는 자갈부터 바위까지 다양한 크기의 돌들, 돌무더기, 또 산사태의 흔적들이 보였다. 길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살짝 경사가 져있어 걷기가 쉽지 않았다. 강풍과 함께여서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지그재그 경사길을 오르다보니, 어느새 저 멀리로 마을이 보였다. 산장이 곧이라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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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3037.HEIC 럭스모어 산장

럭스모어 산장에 도착한 건 오후 7시 쯤이었다. 학생들이 단체 트레킹을 왔는지 산장 관리인이 수업을 하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들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왁자지껄한 건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학생들이니까 불편하지는 않았다. 뉴질랜드는 음주 관련 법에 꽤 엄격한 것 같아 고성방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했다.


산장은 깨끗했다. 원하는 침대에 짐을 내려놓고 체크인 메모장에 이름과 예약 번호를 적어 넣으면 된다. 우리는 너무 늦게 도착해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3개밖에 안 남아 있었다. 모두 문쪽이었다. 2층 침대 두 자리를 고르고 짐을 풀었다. 매트가 차긴 했지만 푹신해서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따뜻하기도 했다.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고, 칸이 4개 정도 있었다. 벙커에 비해 화장실은 추웠지만, 그래도 드디어 당당하게 수세식 화장실을 누릴 수 있는 날이었다!

IMG_3054 2.HEIC 산장 창 밖으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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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으로는 연어 구이, 볼로네제 간편식을 먹었다. 케아의 공격만 아니었어도 저녁은 라면이었을텐데... 간편식은 역시나 맛이 없었지만 그런데로 배는 불렀다. 작은 병에 담긴 에스프레소 마티니와 글렌피딕, 캔에 담긴 로제 와인도 홀짝홀짝.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내일이 케플러 트랙의 마지막 날이구나. 10시는 돼야 지는 뉴질랜드의 햇님 덕분에 산장 주변도 산책하고, 맑은 공기도 잔뜩 들이켰다.


나 아쉽나...? 조금...? 이런 생각을 하며 스르르 잠이 드나 했는데 온갖 이 가는 소리와 괴상망측하게 코 고는 소리들이 들려와서 잠을 거의 제대로 못 잤다. 6시에 일어나기로 한 터라 알람을 그때 맞춰 놨는데 2시까지는 거의 한숨도 못 잤고, 이후에도 자다 깼다 했다. 비몽사몽 간에 토마토 리코트 스프를 끓어 먹고 마지막 정비를 시작했다.


이날은 아침 7시 40분쯤 산장을 떠났다. 식량도 부족하고 하니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산장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때의 감정은 시원 섭섭이 맞는 말 같다. 거의 내리막길이어서 걱정되는 것도 없었다. 오래 걸을 수록 점점 허벅지에 힘이 딸리기는 했지만 그렇게 가파르지는 않아서 조금씩 쉬었다 가면 괜찮았다.


오전 10시 브로드 베이(Brod Bay) 캠핑장에서 화장실에 들렀다. 원래는 불닭볶음면을 끓여 먹으려 했으나, 샌드플라이에게 더 물리기는 싫었으므로 생라면을 씹어 먹으며 걷기로 했다. 피로가 쌓여 혓바늘이 나있던 터라 생라면 씹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샌드플라이보다는 이게 나으니. 생라면 먹었다가, 초콜릿 먹었다가, 사탕도 먹어가며 버텼다.


그래도 이 때부터는 호수를 따라 길이 이어져 있어 걷기 편했다. 조금 흐리기는 했어도 호숫가를 따라 나란히 서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남달랐다. 더운 여름이었다면 호수에 뛰어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리시 번에서도 강에 뛰어들 수 있었을텐데!)


약 4시간 만에, 마지막날의 트래킹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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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인근의 브로드 베이 캠핑장과 그 주변 풍경


케플러 트랙에 다시 갈 일은 없겠지만 2박 3일을 걷고 나니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풍경은 아마도 보가츠루 백패킹의 상위 호환 정도 되는 것 같고, 생리만 안 했어도 2배 정도는 행복하게 걸었을 것 같다. 8개월 전에 잡은 여행인데 어떻게 날짜가 그렇게 딱 떨어지는지! 여자 어른의 백패킹엔 패널티가 너무나도 많다. 다음 번엔 진짜 황제 트레킹이라는 스위스로..?


p.s. 그리고 마지막으로, MILES BETTER PIES 꼭 먹으세요. 테아나우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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