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 6일 간 니스에 머무르면서 들른 해변을 세어보니 8곳이었다. 날씨는 내내 좋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해변에 이르렀을 때 흐려졌다. 빗물은 주홍색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니 해변마다 분위기가 꽤 달랐다. 추천하지 않는 해변은 딱히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lage Paloma
Plage* Paloma는 니스 근교인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Saint-Jean-Cap-Ferrat의 볼록 튀어나온 육지에 자리한 해변이다. 숙소는 니스 시내였지만 나의 첫 해변은 이곳이었다. 작은 해변이지만 피서객이 꽤 많았다. (*Plage: 해변의 프랑스어)
니스 해변의 매력은 돌이라고 생각한다. 모래처럼 발바닥에 들러붙지 않고, 따뜻하게 데워진 돌 위에 누우면 마사지하는 기분도 난다. 이 해변에는 돌 사이사이에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끼어 있었다. 발바닥에 붙으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래도 해변을 나무가 둘러싸고 있어야 운치가 있으니 나무를 미워할 순 없었다.
다행히 니스는 해변마다 샤워기가 있다. 바다에 들어갔다가 시원하게 샤워물로 헹궈주고, 드러누워 책을 읽다가 햇살이 슬슬 따가우면 다시 물에 들어갔다.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 갔지만 시야가 좋지 않아 맨 몸으로 즐겼다. 프랑스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수영을 잘하는지 물개가 따로 없다. 물 위를 침대 삼아 누워 있길래 따라 하다 파돗물을 잔뜩 들이켰다.
니스 해변에 자리 잡은 식당들은 가격이 매우 비싸다. 혼자여도 한 끼에 60유로는 각오해야 한다. 선베드까지 빌리려면 헉소리가 나는 비용을 치러야만 한다. 이런 사치는 마지막 날 해보기로 하고, 해변에 깔린 형형색색의 돗자리와 파라솔들을 바라봤다. 내일은 도시락을 싸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꼬르륵 대기 시작할 때쯤 해변에서 걸어 나왔다.
Plage Cros Dei Pin
수영복 위에 셔츠만 입고 돌아다니다가 길거리에 걸린 경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고문에는 수영복만 입고 돌아다니면 38유로의 벌금을 물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큰일 날 뻔했다. 부랴부랴 매무새를 고치고 다시 걸었다. 피자가 먹고 싶었다.
Plage Paloma에서 Plage Cros Dei Pin까지 향하는 길목에 이탈리아 피자집이 한 곳 있다. Little Italy Pizzeria란 곳인데 피서지 물가 치고는 가격도 저렴했다. 주인은 이탈리아 사람인 것 같았다. 짭조름한 맛이 당겨 앤초비 피자를 주문했다. 정말 짰고 맛있었다. 쫄깃쫄깃.
Plage Cros Dei Pin 방향으로 좀 더 걷다 보면 깨끗한 공중 화장실도 하나 있다. 50센트가 없어서 20유로를 내밀었더니 그냥 들어가게 해 줬다.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잔돈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날씨 탓인지 Paloma보다는 Cros Dei Pin이 더 깨끗하다는 인상이다. Cros Dei Pin은 돌보다는 자갈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해변을 감싸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피자를 먹었다.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피자 한 판을 혼자 먹어본 적 없는데 왜인지 수영을 하며 먹으니 자꾸만 피자가 들어갔다.
조심해야 할 건 소매치기가 아니라 나였다
이날 Saint-Jean-Cap-Ferrat 중앙에 있는 Villa Ephrussi de Rothschild에도 들르려고 이동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빌라 입구에서 입장료를 사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카드가 사라져 있었다. 현금이 조금 있어서 숙소에 돌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카드 정지 시키고 다시 송금해서 다른 카드 찾아 쓰고... 복잡한 절차를 떠올리니 속이 답답했다.
곧장 돌아서서 Cros Dei Pin으로 뛰어갔는데 웬걸. 돗자리를 폈던 자리 주위의 자갈들을 뒤엎어보니 카드가 그대로 있었다! 니스 해변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 바다에 들어갈 때도 내 자리를 힐끔대곤 했는데, 조심해야 할 건 나였다. 바지를 입으려고 모래를 털다가 카드까지 털어 없애버린 나... 운 좋게도 내 옆자리에 돗자리를 깔았던 커플이 그대로 있어서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고, 운 좋게도 아무도 내 카드엔 관심이 없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Villa Ephrussi de Rothschild로 향했다. 로스차일드가의 남작부인이 1900년대 초에 지은 집이라고 하는데, 위기를 지나고 나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곳 입장료는 무려 17유로인데도 말이다.
백만장자인 친구네 집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집들이 비용으로 17유로면 나쁘지 않았다. 카드를 되찾은 기쁨에 빌라 내부 카페에서 소르베까지 시켜 먹었다. 그 어느 때보다 새콤했다. 가격이 뭐가 중요해? 행복하면 됐지.
Plage Publique de Castel
Plage Publique de Castel는 Colline du Château 바로 앞에서 공항까지 쭉 이어지는 긴 해변 첫머리에 자리한 해변이다. 'I Love Nice' 조형물도 바로 이곳에 세워져 있다.
오후 8시가 다 돼서 도착한 해변이어서 도저히 물에 들어갈 엄두가 안 났다. 해변이 공항까지 이어지다 보니 수영하기 좋은 곳과 아닌 곳이 나뉘어 있었고, Plage Publique de Castel는 수영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날은 파도도 셌고, 전날 파라솔을 당근 해준 한국인 여행객이 이 해변에 해파리가 너무 많다는 얘기를 한 것도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뛰어드는 사람은 있었다. 대부분은 자리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봤다. 나도 합류해 오랫동안 물멍의 시간을 가졌다. 경사지게 쌓여 있는 돌들 때문에 마치 영화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영작은 바다였다.
이 해변에 가게 된다면 Colline du Château를 올라 폭포를 보고 오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늦지 않게 가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닌 니스 해변이 끝내준다.
Plage publique de l’opera
다음날엔 이름처럼 오페라 하우스 앞에 있는 Plage publique de l’opera로 갔다. 전날 저녁 잠깐 앉아 있었던 Plage Publique de Castel보다 공항 쪽으로 좀 더 걸으면 된다.
이 구역에는 파라세일링 같은 액티비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액티비티에 공간이 할당되다 보니 돗자리를 필 수 있는 공간이 여유롭지는 않다. 상의를 헐벗은 채 돌아다니는 중년 여성들도 더러 보였다. 태닝 때문에 엎드린 채 상의를 벗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 봤어도 아예 그러고 돌아다니는 건 처음 봤다. 이상하게도 불편하진 않았다. 몸에 밴듯한 자연스러움 때문일까.
하루 만에 이미 온몸은 새까맣게 탔다. 파라솔을 이고 지는 게 귀찮아서 숙소에 두고 올까 생각도 했지만 한낮엔 태양빛을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도시락까지 쌌더니 짐이 무거웠다. 좀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웠다 앉았다 하며 오늘의 일정을 고민해 봤다.
'오늘은 근교까지는 못 가겠다...' 이날은 공항까지 이어지는 해변을 쭉 따라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걷다 보니 서서히 배가 고파왔다.
Neptune Plage
랍스터롤을 파는 해변 식당이 있길래 가보기로 했다. Negresco Beach Club이라는 이름의 이 식당은 숙소에서 꽤나 멀리 걸어야 하는 Neptune Plage에 있었다. 잠깐 망설였지만 그런대로 할만하다는 생각에 천천히 거리를 구경하며 걸었다. 랍스터롤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런데 식당에 도착해 메뉴를 받아보니 랍스터롤이 없었다. '랍스터롤은 없는 건가요?'라고 못 물어봤다. 그런 건 못 물어본다. 어쩔 수 없이 갈 곳 잃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시선이 간 곳은 양고기. 그래, 프랑스 와서 양을 못 먹었지. 스스로를 위로해 가며 또다시 예상치 못한 지출을 감행했다.
프랑스는 식사를 끝마치면 꼭 디저트도 필요하냐고 묻는데, 그것도 거절 못 하는 편이라 디저트까지 먹고 말았다. 선베드에 누운 피서객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식사를 마쳤다. 아, 그리고 양고기는 너무 질겼다. 눈이 즐거우니 됐다.
니스의 상징과도 같은 파란 철제 의자가 나란히 서 있는 해변을 걸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Plage d'Èze
니스에 머물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자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해변 도장 깨기 하러 온 것도 아닌데 색다른 해변이 없을까 자꾸만 찾게 됐다.
Plage d'Èze는 한국인들도 많이들 찾는 해변이다. 기차를 타고 에즈에 도착했다. 기차역이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간이역 같았다. 돌아갈 때는 안내 전광판이 없어 방향이 헷갈리기는 했지만.
Plage d'Èze는 명성만큼 감탄할 정도의 경관은 아니었다. 그래도 해변 자체가 꽤 넓어서 그런지 사람이 붐비지 않아 좋았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소매치기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날은 바람이 꽤 셌다. 기온은 높았는데 바람 때문에 파도가 무섭게 쳤다. 시야도 안 좋다 보니 수영을 편히 즐길 수가 없었다.
그늘 아래 있으면 춥고, 그날 밖에 있으면 태양 때문에 온몸이 따갑고. 정말이지 기이한 날씨였다. 내일은 바람이 좀 덜 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니스 시내로 돌아가서 다시 근처 해변을 좀 더 걸었다. 비치볼을 즐기는 사람들이 저물어 가는 햇살 아래서 반짝였다. 바다는 소음을 흡수해 시끄러워도 평화롭다.
Marinieres Plage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공항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가보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려 오래된 항구도시 Villefranche-sur-Mer의 골목들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해변에 줄지은 식당들이 나온다.
나는 그중 Alma Goût Méditerranée - Villefranche라는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감바스 파스타를 시켰는데 생면인 것 같았다. 천천히 먹어서인지 면이 떡지긴 했지만 그런대로 입맛에 맞았다. 무엇보다 항구 바로 옆에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항구를 따라 걸으면 나오는 Marinieres Plage는 가로등 조명과 보트 위 항해등의 빛을 받아 은은했다. 한 커플이 작은 보트를 타 노를 젓고 있었다. 그들을 보니 왜인지 프러포즈를 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다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갑자기 어두워져 버스를 찾아보니 막차가 곧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역에 도착했는데 한참이고 버스가 오지 않았다. 그동안 노숙자에게 마약을 파는 젊은 청년과 망사 스타킹에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밤이었다. 30분 정도 기다린 끝에 막차가 왔다. 밤늦게 혼자 다닐 수 있는 동네는 아닌 것 같다.
Plage Mala
대망의 마지막 날. 아껴 두었던 해변 Plage Mala로 직행했다. 역시 기차를 타고서다. Cap d'Ail역에 내려 20분 정도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을 잃기 쉽다고 해 한눈팔지 않고 걸었는데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비밀의 해변 같은 공간이 짠 하고 나타났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미역이 너무 많았다. 가장 안 쪽에 사람이 별로 없어 자리를 잡은 거였는데 패착이었다. 검은 물체들이 시야에 자꾸 들어오니 도무지 바닷물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 체념하고 책을 읽는데 책 위에 주홍빛의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책 내지가 살짝 주홍빛이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비 자체가 그 색이었다. 나중에 한 식당 종업원한테 물어보니 모래를 먹은 구름이 비로 떨어져서 그런 거란다. 확인은 안 됐지만...
기분이 살짝 나빠져서 그대로 해변 식당에 들어가 버렸다. 아껴뒀던 사치를 해보려는 거였다. 아쉽게도 비가 오는 바람에 선베드는 쓸 수 없었고 혼자 앉기엔 지나치게 넓은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스테이크를 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강풍이 불어왔다. 식당의 파라솔이 뽑히기 직전 직원들이 파라솔을 걷어갔다. 파라솔을 걷으니 조금씩 내리는 비는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쳤다 내렸다 했다. 이날만을 기다렸는데.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덥기라도 하면 수영을 할 텐데 구름에 가린 햇빛은 이 날따라 활약할 생각을 안 했다. 흐린 날의 마지막 만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