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리아 Mar 21. 2022

가장 나다운 시간

 김영하 작가는 친구에 대해 이렇게 글을 쓴 적이 있다.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던 거죠. 친구를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각기 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20대,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앞으로도 함께 해나갈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러잖아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은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더군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김영하 <말하다> 中          



 많은 분이 이 글에 공감했었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 작가가 말하는 마흔이 넘어도 잘 공감이 안 된다. 과연 생을 마감할 때, 친구들과 어울린 시간보다 책과 음악에 더 많은 시간을 못 썼다고 후회가 될까?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나는 여러 개의 내가 있다. 아들과 있을 때, 아내와 있을 때, 친구와 있을 때, 직장에 있을 때 등 상황마다 다른 내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메타버스처럼 다 다른 세계의 나인 것이다.     


 이 중 완전한 내가 될 수 있는 세계는 오래된 친구와 있을 때다. 꾸밀 필요도 없고, 잘 보이려 할 필요도 없다. 무언가를 바라고 행동할 것도 없다. 도덕적이고 모범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껍질을 다 벗겨낸 모습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고 편안하다.     


 그렇다고 그 세계에서 뭔가 유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 친구와는 20년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초등학교 친구와는 30년째 같은 에피소드로 웃는다. 멀리서 보면 정말 무익하고 가치 없는 시간이라 할 수 있으나, 나는 그 시간이 소중하다. 아들과 놀면서 웃는 웃음과 친구들과 있을 때 웃는 웃음은 결이 다르다.       


 어느덧 다들 유부남의 아빠가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바쁜 생활 속에서 시간을 만들어 뫼비우스의 레퍼토리를 쏟아낸다. 결말을 다 아는 이야기인데 처음 듣는 사람처럼 웃는다. 코로나 전에는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아이를 재우고 사우나에서 만났다. 아내에게는 목욕이라는 핑계로 집을 나서는 것이다. 사우나가 끝나면 카페에서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눈다. 못 나눈 이야기라고 해봤자, 이미 고을대로 고은 곰탕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라는 티모시 페리스의 책을 보면 드류 휴스턴이라는 드롭박스(Drop Box) 공동 창업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MIT 졸업식 연단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이 22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테니스공과 동그라미, 숫자 30,000’이 적힌 컨닝 종이를 주고 싶다고 했다.      


 첫 번째로 테니스공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몰두할 수 있는 관심사를 찾으라는 것이다. 개와 공놀이를 해보면, 공을 던져주면 끝까지 쫓아가 낚아채고 마는 집중력을 보인다. 삶에서 그러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동그라미는 당신 그리고 당신과 가장 친한 친구 5명이 속한 서클(circle)이라는 뜻이다. 이 동그라미 안에 있는 친구 5명의 평균이 당신이라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이 동그라미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묻고. 답하고, 깨달음을 찾아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숫자 30,000의 뜻은 인간이 사는 평균 일수를 말한다. 여생을 숫자로 보면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나도 평균이라고 한다면 이제 16,000도 안 남았다) 그렇기에 삶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드류 휴스턴이 의도하는 바와는 다르겠지만, 나는 테니스공을 행복이라 정하고, 나와 친구의 행복을 위해 동그라미 평균을 높일 수 있도록 더 나은 내가 되고자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30,000중에 이미 10,000을 같이 보낸 친구들과 남은 16,000도 의미 없는 농담을 하면서 웃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삶을 의미 있고 소중히 여기는 방법이다. 



작가의 이전글 범인의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