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기초연기가 아니라 연극실습이었다.

내가 연기를..?심지어 연극을 하라고?

by 사육일칠


"우리 연극 한 번 올리지 않을래요?"


이 제안, 극단이었다면 말할 필요가 없다. 극단이라면 극을 올리는 게 당연하니까. 보통 제안을 할 때는 그 제안에 포함된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을 때이다. 즉, 연극을 올린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온 사람에게, 누군가가 이 말을 꺼낸 것이다.


부경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는 '직접 연기를 하는 것' 빼고는 대부분의 창작 관련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영상 제작 관련 교수님은 '학생들이 어떻게 연기를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에게 연기만 가르쳐 준다면 완벽할 거야'라고 생각을 하시고는, 극단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현직 배우분을 초빙 교수로 모셨다. 그렇게 '기초연기'는 전공학점으로 인정되는 정규 과목으로 개설되었고, 학점을 채워야 해서 이 과목을 듣게 된 학생은, 오티 때 영문도 모른 채 연극 한 번 올리자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첫 수업에서 그 말을 들은 학생에게 더 청천벽력 같은 점은, 70%의 학생이 동의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방학 때 특강 느낌으로 동일한 교수님과 연기 수업을 함께 한 학생들이 이 교과목을 많이 신청하였고, 만약 정규 과목으로 개설된다면 연극을 올릴 것이라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머지 30%의 학생은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극을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아마 몰랐기에 일단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불안을 표하는 학생도 물론 있었다. "연기.... 많이 어렵나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와 같은 불확실함을 드러내는 질문이 터져 나왔고, 이에 교수님은 확신을 담아 응답했다.


"어렵지 않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듣고도 학생의 표정엔 여전히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연기를 배우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연극을 올린다는 것은 배운 것을 올바르게 실현시켜 관객에게 인상을 남겨야 함을 의미하니까. 그런데 만약 자신이 연기와는 너무 안 맞다는 걸 수업 도중 뒤늦게 깨닫게 된다면? 대체할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찾지 못한다면? 찾았다 하더라도 내 성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이라도 수강 취소를 해야 하는 건가? 따위의 불안이 요동쳤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첫 수업은 그렇게 어려운 걸 하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학생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는 게 어려웠을 뿐. 교수님은 무대 위로 우리를 부르셨다. "올라오세요." 그러곤 약 15명 정도의 사람들끼리 원을 그려 서 있게 하시고는, 원 중앙에 비치발리볼 같은 가벼운 공을 던져 주셨다.


AD_4nXc00FieBnSgCgN4DLa3VWd02Vt7aY9xMrGmkpgPH4oFwFlkx6Ch3zHatkZjfMrkL9L10DoCQomHtqlSliMIeXgRJ8Dt5DujET86N3-tjhoCZNNoiA27SLWEeTKRA7M1EblZAdYXMw?key=U0xpOu5dNLsgvGPC9RiSSw 바람이 빠져서, 맞아도 전혀 안 아플것 같은 공을 던져 주셨다.(ChatGPT 이미지 생성)


"이게 뭔가요 교수님?"

"이 공을 상대에게 던질 겁니다. 대신, 받는 상대방의 이름을 말하고 난 다음 던져 주세요."

"오..."

"그럼 일단 통성명부터 하세요. 누구부터 자기 이름 말할래요?"


저는 000입니다, 저는 00학번 000입니다.... 죽 말하고 난 다음, 공 던지기 놀이가 시작되었다.

교수님이 이 놀이를 시킨 이유를 몰랐을 때는, 상대의 이름을 잘못 부르고 던졌을 때, 상대의 실망한듯한 표정을 지켜본 다음 던진 사람에게 다 같이 "뭐라고요? 이름 뭐라고요?" 하면서 비난(?)을 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름을 잘못 불렸는데 공이 날아오는 순간, 빈정이 상해 공을 받기 싫어져서 몸에 툭 부딪히게 놔두는 사람도 있었고. 또는 한참 한 사람을 쳐다보다가 완전 다른 사람을 이름을 부르고는 노룩 패스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든 행위는, 교수님이 이 놀이를 시킨 의도에 완벽히 반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이걸 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정적)

"공을 던질 때, 받는 사람을 배려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 전혀 그러지 않았었다. 그냥 이 공을 다른 사람에게 빨리 던지기 바빴었지. 이름을 부르자마자 공을 던져서 깜짝 놀란 채로 받으려다가 공을 놓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공을 던질 때, 만약 상대를 배려한다면, 이름을 정확히 부르고,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친 다음, 나 너한테 줄 테니 받을 준비 해~라고 말하는 듯한 제스처 후, 받기 쉽게끔 가슴을 향해 던졌겠죠. 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내 감정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감정을 잘 확인한 다음 내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죠. 앞으로 여러분이 연기할 때도 오늘 있었던 일을 유념하길 바랍니다."


이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게 익숙해질 때쯤, 원을 그리고 서 있는 채 공 하나를 주고받고 있던 학생들 안으로 공 하나가 통, 하고 들어왔다.


"자, 이젠 공 2개로 주고받 보세요!"


말씀이 끝나자마자, 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공이 하나 더 늘어나 정신없는데 이름까지 잘못 부르면 진행이 안될 테니까. 저분 이름은 알겠고, 저분도 알겠는데..... 저분은 누구지? 하는 순간, 공 2개가 공중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받을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던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 못 외운 이름이 많다. 그래서 저분 누구지?? 아직 못 외웠는데..! 다행히 공이 왔다 갔다 하며 여러 이름이 불렸고, 이름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이름을 외워놓으니, 상대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으나, 공 하나일 때에 비해 2배 이상으로 집중해야 했다. 정신없는 공 주고받기가 끝나자, 다시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사실 이 공 주고받기의 본 목적은-물론 상대를 배려해서 공을 던지는 것도 있지만-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운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텍스트를 머릿속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의 목적과 연기의 방향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훈련이죠. 지금처럼 공이 한 개 더 늘었을 땐 이전보다 좀 더 큰 집중력을 요하게 되죠. 질문 있으신가요?"


학생들은 처음 하는 활동에 낯설었는지, 각자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만 봤다. 나도 마찬가지.


"질문 없으시면... 저는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시간 때문에 가보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첫 수업은 서로의 이름과 서로가 공을 던지는 스타일, 그리고 공 던지기와 연기의 연관성에 대해 배우고 끝이 났다. 힘든 점은 없었고 되게 흥미롭다는 생각만 있었다. 실제로 연기를 해 본 것도 아니기에, 이 공 던지기 놀이의 원리를 깨닫는 날이 과연 올까? 그리고 과연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이름을 부르자마자 공을 급하게 던지는 것이 실제로 내 성격이었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초면인 사람에게 그런다는 건 은근히 무례한 게 아닌가, 그 공이 가벼운 공이라서 위험하지 않았기에 급하게 던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가벼운 공이든 무거운 공이든 '뭔가가 갑자기 날아온다'는 상황 자체가 공포일 것이다.


하지만 무례했다고 단정 짓기 어려웠던 것은,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상대를 배려해야 했음을 깨달은 점이다. 가벼운 공을 던진다 하더라도 상대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인해야 함을 '몰랐을' 뿐, 알면서 그랬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걸 알게 된다면 아무리 조그만 탁구공이어도 천천히, 이상적인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줄 것이다.


그런데 다음 주에는, 눈도 뜰 수 없는 수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