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남자와 손 잡는 날

눈 감고, 손 잡고, 앞으로!

by 사육일칠


눈을 감은 채 동성에게 손을 잡혀 이끌리듯 걸어본 적 있는가. 난 딱 한 번 있다. 교수님의 명령으로 인해, 남자인 나는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꽉 잡고, 눈을 꼭 감고, 어떠한 의지도 없이 끄는 사람의 끌림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날은 기초연기 두 번째 수업 날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의자는 강의실 가장자리로 치워져 있고, 중앙은 텅 비워져 있었으며, 교수님은 강의실에 있는 여러 소품들-소화기, 소파, 손소독제, 간이 의자-를 비어있는 중앙에 곳곳이 배치하고 계셨다. 배치에는 어떠한 규칙도 없어서, 대체 뭘 하시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마지막 장애물로 큰 소파를 땀을 흘리시며 배치하시고는 한숨을 휴, 하시고 힘이 부친 목소리로 말씀하시길,


"자! 일단 오늘 할 활동의 파트너를 정해 봅시다. 파트너를 직접 정하셔도 됩니다."


말씀이 끝나자마자 인상이 가장 좋은 남자분을 빠르게 선택했다. 내 의지로 파트너를 여자분으로 선택하는 건 꺼려진다. 남자도 많은데 굳이 여자분 한 분을 콕 집어 선택한다는 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괜한 걱정 때문이기도 하고, 동성이 아니면 스킨십을 거의 못하게 되기에 집중해서 활동에 임하기 힘들기도 해서이다.


"일단 파트너의 손을 잡으세요. 여러분은 앞으로 파트너와 함께 이 강의실을 누빌 겁니다.

끄는 사람이 안내견 역할, 끌림 당하는 사람이 시각장애인 역할입니다. 안내견 역할은 파트너가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잘 이끌어줘야 합니다"


우선 손을 잡는다. 동성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처음 뵀을 때 하는 악수나, 하이파이브 말고는 잡을 일이 절대 없을 것 같은 남자의 손을... 일단 잡는다. 분명 따뜻하긴 하지만 마음은 티끌만큼도 움직이지 않아 시큰둥하다.


"자, 시각장애인 역할은 이제 눈을 감으세요"


갑자기 무서워진다. 장애물과 부딪힌다면 어떡하지? 손 잡은 사람이 방향을 잘못 안내하면 어떡하지? 움직이는 다른 사람과 부딪혀서 넘어지게 되면 어떡하지?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른다. 남자 손의 온기가 불현듯 소중하게 느껴지고, 있는 힘껏 손을 꽈악 잡는다.


"저기... 아파요."

"죄송합니다. 근데 잘 부탁드려요..."


처음 잡았을 때와 눈 감고 무서움을 느낀 때, 이 두 순간의 중간 정도의 힘으로 손을 잡는다. 이 순간만큼은 내 몸이 먼저 움직일 때, 다리가 아닌 팔이 먼저 끌리듯 움직인다. 먼저 움직이는 게 다리가 아니라는 건 원하는 곳에 이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안내견 역할인 남자분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다. 파트너를 고려하지 않고 평소대로 움직이다 보면 파트너가 다친다. 안내견이 그냥 신나서 평소대로 한 걸음 옮기면 파트너는 "으악 뭐야!" 하고 어딘가에 부딪힌다. 그제야 안내견은 조심히 가야 함을 깨닫고, 다른 여러 안내견들의 파트너의 비명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온다.


"오오오!!!! 어어"

"야야 뭐야! 잠시만요...!"


잡은 손을 틀고 난 다음에 바로 움직이면 옆에 있는 물체와 부딪히네? 아 그럼 1초 후에 움직여야겠다.. 그럼 안내견도 내가 움직이는 타이밍에 맞게 손을 움직여 주겠지...


점점 익숙해지고 나니, 장애물에 직접 부딪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지고, 해봤자 스치는 정도에 그쳤다.


"꽤 할만한데?"


그때, 딸깍.


뭐지..? 뭔가 빛이 사라진 듯한 느낌인데, 싶을 때 오어어..! 하는 안내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확실히 불이 꺼진 게 맞구나. 그럼 안내견도 나와 상황이 비슷해졌다. 물론 잘 보이긴 하겠지만, 안내견이 나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선 불이 켜져 있을 때보다 훨씬 집중해야 할 것이다. 곧바로, 안내견의 손은 이전보다 두 배로 천천히 움직였고, 떨고 있는지 진동까지 느껴졌다. 어떻게든 나를 다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각오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들리는 교수님의 말씀.


"눈을 감고 장애물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촉각, 청각, 후각에 집중해 보세요. 이건 무대에서 연기를 할 때도 중요하게 살펴야 하는 요소입니다."


네. 교수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소파에 부딪혀서 자빠질 것 같거든요.


웅성대는 소리의 크기는 그대로였지만 걱정스러운 소리가 여러 군데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1분가량 공포의 시간을 보내고, 딸깍, 소리가 나며 바로 눈치챌 정도로, 눈을 감은 상태임에도 환함이 느껴졌다.


"이제 눈을 뜨세요."


눈을 뜨니 공간은 엉망이었다. 소화기는 넘어져 있었고, 소파는 삐뚤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손소독제는 넘어진 채 뚜껑과 몸체가 분리되어 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각장애인 역할의 학생끼리 부딪힐 듯이 얼굴을 마주하는 상태의 팀도 있었다.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들끼리였는데도 한바탕 소동을 겪고 나니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기다는 듯이 서로를 가리켰다.


"이제 역할을 바꿔서 해봅시다."


이제 무서울 건 없다. 내가 이 사람을 리드할 차례다. 확신을 담아 텁하고 파트너의 손을 잡았고, 파트너도 같은 힘으로 내 손을 잡았지만,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날 믿고 따라오세요! 하고 당차게 나아갔는데, 파트너는 어어..! 하고 몸이 흔들리며 따라왔다. 급한 이동 후 잠시 멈추자 손의 떨림이 더 심하게 느껴졌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멈춘 자리에 10초 정도 서 있었다. 일단 나아가진 않고 팔만 휘저어서, 방향을 돌렸을 때 파트너가 어느 정도 몸을 돌리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체크하고, 팔을 당겼을 때 어느 정도의 힘을 주어야 내가 의도한 거리를 이동하는지 체크했다. 좋아. 이동해 보자. 팔을 돌려서 방향을 안내한다. 내 몸이 향하는 방향과 파트너의 몸이 향하는 방향이 일치할 때까지 기다린다. 일치되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손을 잡아당긴다. 최대한 파트너가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천천히... 불이 꺼지더라도 나만 잘 이끄면 되니 문제없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어둠엔 적응을 하니까. 이윽고 불이 뚝 꺼졌지만 파트너와의 감각은 연결된 채로 겁도 없이 강의실을 누볐다. 그러다 파트너가 소파에 부딪히기 직전에,


"이제 마무리합시다~"


감각을 잃은 사람과 소통하는 것은 불편했고, 그 불편함을 타파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지만, 집중한 만큼 상대와 강하게 연결되어 그 순간에 몰입했다. 그래서인지, 교수님의 마무리하자는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파트너의 손 떨림이 멎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을 놓았다. 땀이 흥건했다. 그 땀이 내 것만은 아니겠지. 남자의 손의 굳은살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손을 꽉 잡고 활동했지만 불쾌하기보단 상쾌했다. 서로 고생했다며 악수를 했다. 이번엔 동일한 힘으로, 떨림은 전혀 없이, 확신을 담아서.


이때까지만 해도 수업은 할 만했다.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여태까지 한 거라곤 상대 이름 부르고 공 던져주기, 상대 손 잡고 이끌어주거나 이끌림 당하기 정도였다. 책임감도 노력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눈을 감고 있는 모든 학생들을 불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이끄는 듯이 깜깜하고 막막한 일이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연극을 올려야만 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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