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대본 리딩
연극은 혼자서 올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다양한 노력이 있어야만 연극은 완성된다. 연극을 한 번 올려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하나, 하나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는 걸... 어떤 극을 올릴 것인지? 극 대본을 공연화할 시 원작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 연출은 어떻게? 언제 얼마나 자주 모여서 연습할 것인지? 팜플렛은 어떻게 제작? 공연 장소는 어디서? 홍보 포스터는 몇 장이나 발행할 것인지? ..... 등등.....!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많은 사람의 다양한 노고를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수준이다. 이런 과정을 다 알고 있어도, 연극을 한 번 올리고 난 다음의 쾌감을 잊지 못해 계속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기초연기를 수강하는 학생들에겐 모든 게 처음, 즉 연극 올리는 과정을 모르니 고생길이 펼쳐져있다는 것조차 알 리 없었다. '내가 연극을 올려야 한다니! 할 수 있을까?'따위의 희미한 두려움 정도는 있었을 테지만, '이 대사를 나는 당당한 느낌으로 소화하길 원하는데 연출팀에선 눈치 보는 느낌으로 해주길 원하네. 연출팀을 어떻게 설득하는 게 좋지?' 정도의 또렷한 걱정은 없었을 테다. 나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하지만 연극을 이미 올리기로 결정된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떤 극을 올릴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다들 앉아 보세요. 오늘은 대본 리딩을 하겠습니다."
대본 리딩 전날에 온라인 학습 시스템에 파일이 올라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출력을 해 온 사람은 없었다. 교수님은 그걸 예상했다는 듯, 대본집을 16명의 인원에 맞게 미리 출력해서 가져오셨다. 대본집 하나당 34페이지. 이 페이지에 있는 대사를 다 외워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이 많은 양의 종이를 쫄대 파일에다 끼워 넣어야 했는데, 정말 온 힘을 다해도 끼워넣기가 어려웠다. 아... 대본집을 세팅하는 것부터 쉽지 않구나. 연기를 하는 건 둘째 치고, 이 대사를 다 외울 수 있을까? 속으로 걱정하며 촤르르륵 종이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넘기고 나서, 표지를 봤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12인..? 그럼 연극을 한 번 할 때 12명이나 등장한다는 말인가? 물론 학생 총원이 16명이니 가능은 하겠다만, 그럼 나머지 4명은 무엇을 한다는 거지?
"일단 이 극을 선택한 이유부터 말씀드리자면...저희가 기초 '연기' 수업이잖아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많은 학생이 연기를 직접 해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에 이 극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나는 연기 도저히 못하겠다! 싶은 학생이 있으면 연출을 맡게 하려 하는데, 혹시 있나요?"
남자분 한 분, 여자분 두 분이 총 3명이 손을 들었다. 세 분 모두 떨떠름한 웃음을 보이며 조심스레, 그러나 결코 느리지는 않게 손을 들었다. 연출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연기하는 게 부담스러우셨던 걸까.
"교수님 그럼 연기하는 사람이 13명인데, 12명만 필요하지 않나요? 나머지 1명은 어떡하나요?"
"더블 캐스팅입니다. 그러니까, 극을 두 번 올리고, 한 역할을 두 배우가 맡는 거죠. 아마 12명의 배심원 중 8번 배심원을 더블 캐스팅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잠시 웅성인다.
"참고로 이 극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아버지를 죽였다고 의심받는 소년의 유/무죄를 판결하기 위해 배심원이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기서 소년은 그 아버지의 아들이고요. 모든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유죄를 주장해야만 그 소년을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즉 한 명만 무죄라 주장해도 소년은 풀려난다는 거죠. 8번 배심원이 바로 그 한 명, 소년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역할입니다."
더블 캐스팅이라. 그렇다면 누가, 아니 어떤 두 사람이 8번 배심원을 맡게 될까? 극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 같아 보인다. 같은 역할을 두 사람이 맡는다면, 연습하는 내내 그 두 사람은 비교될 것이고, 극을 올렸을 때는 '어떤 8번 배심원이 더 나았던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관객이 분명 존재할 테다. 비교된다는 사실을 부담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원동력 삼아 좋은 연기를 펼치려 노력할 것인가?1시간 정도 대본을 읽을 시간이 주어졌고, 시간 안에 오늘 어떤 배심원 역할로 대본을 읽을지 정해야 했다. 만약 더블 캐스팅과 무관하게 8번 배심원이 끌린다면 망설임 없이 택하면 된다.
교수님께선 '지금 읽는 역할로 고정되는 것은 아니니 부담 없이 선택해 주세요' 라고 하셨지만 ... 한 번 그 역할로 첫 대본 리딩을 하면, 그 역할에 정이 들어 잘 해내야겠다는 욕심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신중히 역할을 골랐다. 그중 한 배심원의 대사가 마음에 콱콱 꽂혔다.
대본의 극히 일부인 10페이지 남짓만 봤는데도, 예의를 밥 말아먹은듯한 이 7번 배심원의 얄미움 ...! 세상 모두에게 미움받을 것 같은 압도적인 비호감 이미지...! 평소의 내가 7번의 정반대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고는 단정하긴 어렵겠지만, 절대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갖추지 않을 태도였다. 그래서, 이 인간의 대사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싸가지 없어 보이겠나 싶어서.
하지만, 첫 대본 리딩부터 싸가지 없어 보이는 인물이 되는 건 쉽지 않았다. 7번 배심원의 대사를 잘 소화하여 야무지게 싸가지 없기 위해서는 대사의 '맥락'을 파악한 다음 읽는 것이 중요했는데, 첫 리딩이다 보니 대사를 '읽는' 것에만 급급하여 맥락 파악이 힘들었다.
위 사진이 대본의 첫 페이지, 극의 시작 부분이다. 이 페이지부터 리딩을 시작했고, 교수님께서 대사 이외의 부분을 구두로 안내해 주셨다.
"1번 배심원(배심원장)이 명단을 체크한다. 9번 배심원, 화장실로 간다. (중략) 정적 속에서 경비 퇴장하고 문 잠그는 소리....철커덩!"
뭐지, 싶어서 멀뚱멀뚱 쳐다보는 학생들.
"5번?"
"5번! 대사 하세요~"
"아 네넵. 어... (부끄러운 듯) 문까지 잠가요?"
"(10번) 당연히 잠그고 하지. 그것도 몰랐어요?"
"(5번) 딴 때는 왜 못 봤지?"
(7번 배심원.. 내 차례다!)
"(7번) 껌 하나 드릴ㄲ..."
"여러분 잠시만요. 끊어서 죄송해요. 자, 5번 배심원 맡은 배우님. 첫 대사가, '문까지 잠가요?'라고 하잖아요. 이 대사가 왜 있을까요?"
"어 ... 문을 잠그니까 놀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요, 이 대사가 극의 시작을 알리는 첫 대사잖아요. '문까지 잠가요?' 라는 대사를 처음에 배치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대본을 쭉 살펴보면 이해가 되시겠지만, 이 극은 배심원단이 결론을 내지 못하면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들어올 땐 휴대폰 등 외부와 연락 가능한 물건도 다 뺏기고요. 그래서, 이 대사는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극이 진행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대사를 하면 한층 더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능해질 거예요. 넘어갈게요!"
역시 연기는 어렵구나... 대사 하나에 저렇게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연기해야 한다니. 갑자기 부담감이 급상승했다. 심지어, 분명히 들었다. 교수님은 학생을 부를 때 '배우님' 이라고 했다! '학생'에서 '배우님' 으로 단순히 호칭을 바꾼 것뿐이지만, 이는 대사를 읽는 마음가짐을 바꿔놓으면서,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가져달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진다. 난 배우다. 신중하게 대사를 읽어내야 한다.
"(7번)껌 하나..드릴까요?"
"(8번) 아니요, 괜찮아요."
아, 내가 듣기에도 자신감 없고 맥 빠지는 대사였다. 피드백이 날아오겠지.
"잠깐만요..! 자 7번, 좀만 더 들이대듯이 할 수 있겠어요?상대가 되게 부담스럽게 느끼게끔 대사 쳐도 괜찮아요. 해볼까요?"
"아..! 넵."
알겠다고는 했지만, 대사를 처음 쳤을 때에 비해 10배의 부담감이 느껴진다. 이제 대사를 쳐야 하는데, 교수님의 지시사항대로 해내야만 다음 사람이 대사를 할 수 있다. 잘 해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대사 치기를 기다리느라 강의실이 너무나도 조용하다. 교수님은 이 적막 속에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이 적막을 뚫고 연기를 해내야 한다니. 배로 늘어난 부담감만큼 정적은 느리게 흘러간다.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