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2주 전. 대사를 다 외운 사람이 없다

연극...올릴 수 있을까?

by 사육일칠


초면에 먹을 걸 나누어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내 경험상, 꼭 껌이 아니더라도 마이쮸 하나 먹지 않겠냐고 다가오는 사람과는 절친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좋은 지인 정도로 남았다. 그러나 먹을 걸 주더라도 비호감인 사람이 있음을 연극 대본의 한 캐릭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캐릭터의 첫 대사는 "껌 하나 드릴까요?" 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격해지다가, 극 후반부에 가니 육두문자가 섞인 분노를 초면인 사람에게 표출한다. 초면인 사람에게 껌을 선뜻 건네지만 욕도 대뜸 뱉어버리는 인간이다. 나는 이 인간의 비논리적, 비이성적인 면이 마음에 들어, 이 인간의 대사를 맡아보기로 했다. "껌 하나 드릴까요?" 라는 대사를 연습 때 내뱉었지만 교수님께서는 '더 들이대듯이 해달라'라고 하셨고, 최대한 표정과 몸짓을 살려서 다시 대사를 해봤다. 얼굴은 비웃듯이 한쪽 볼을 올리고, 옆에 사람은 없지만 있다고 가정하고, 손에도 껌은 없지만 있다고 생각하고 건들건들 껌을 얼굴에 확 들이밀듯이, 최대한 상대가 부담스러움을 느끼게끔. 이렇게 먹을 걸 주는 사람하고는 앞으로도 친해질 일이 없을 것 절대 같다고 생각하게 하자.


"(7번)껌 하나 드릴까요?"

"좋아요, 다음 사람 대사 쭉 갑시다."


좋았나? 정말 좋았다면 '지금 좋아요. 앞으로 그런 식으로 갑시다' 정도의 코멘트를 남겨 주셨겠지만 그러지는 않으셨다. 그래도 넘어갈 정도면 나름 선방했다.


"(8번)아니요, 괜찮아요."

또 다음 내 대사..! 인데, 그전에 지시사항이 하나 있었다.


'우악'스럽게 껌 하나를 입에 넣고 씹는다..라. 그렇다면 아까 줬다가 거절당했던 껌을 냅다 씹어버리는 느낌이겠지. 턱을 최대한 다양한 방향으로 덜그럭거리며 껌을 씹으면 그런 느낌이 나려나? 6번 배심원에게는 왜 다가가는 거지? 그냥 눈에 보이는 사람이면 들이대고 보는 건가.


"(7번) 뉴스 보니까 오늘이 올 들어서 제일 더운 날이래요. 에어컨이라도 좀 켜 주지. 더워 죽는 줄 알았네."


"자 7번 배우님, 여기서,"

"네넵.."

"여기서 죽 읽기보다는, 어디서 끊어 읽을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뉴스 보니까 / 오늘이 올 들어서 제일 더운 날이래요 이런 식으로요. 어디에 강조를 줘야 할지도 생각해 보세요. '뉴스' 가 중요할 수도 있고 '제일 더운 날' 이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캐릭터가 무엇을 중요시 여겨서 상대에게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또, 한 문장 단위로 끊어 읽는다면 호흡을 유지하면서 대사를 하는 게 중요하겠죠. 그래서 이걸 어떻게 연습하냐면... 밖에 걸어가다 보면 간판 많잖아요? 그거 보고 한 번에 음으로 음정 변화 없이 읽어 보는 겁니다. 조선칼국수이십사시간영업합니다.. 대학교학석사연계과정모집.. 런 식으로요."


문장을 호흡의 끊김 없이 쭉 이어나가는 건 바로 되는 건 아니니 그렇다 치지만, 문장의 어느 부분에 강조를 줄 것인지는 대사를 하는 사람이 정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야기를 할 때 한결같은 톤으로 말하지 않는다. 목소리의 크기, 표정, 바디랭귀지로 의사를 표현한다. 이러한 의사를 명확히 표현 가능하다는 것은 내 감정을 정확히 인지한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연기는 캐릭터의 감정을 인지하는 것이기에 첫 대본 리딩 때부터 감정을 잘 전달하기는 힘들다. 대사를 놓치면 다음 대사를 읽는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 내 대사가 언제 나오는지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만 해도 벅찼다.


그러나 내심 더 잘 해내고 싶었다. 이전 대사에서 교수님께 피드백을 받아야 하는 정도였다면, 다음 대사는 한 번에 성공해서 다음 사람이 대사를 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커진 욕심 때문인지 호흡은 흐트러지고 부담감은 커져갔고, 대사를 할 때가 다가올수록 목이 서서히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과제 발표날에 나의 발표 순서가 다가오는 것처럼... 다행히 시간이 지나니 모든 학생에 대한 교수님의 피드백은 줄어들었다. 대본 전체를 모든 인원이 다 읽게 하려다 보니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피드백을 줄 시간이 없었다.


대본 읽는 건 지루했다. 자기 역할의 대사가 없으면 대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특히 대본을 처음 접하면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 때문에 몰입하기도 어렵다. 대사 리딩 시간에서 말 그대로 '리딩'만 이루어지니 극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흐름을 잘 이어나가는 학생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무미건조하게 대사를 읽더라도 자신의 대사에는 감정을 담아 읽어서, 다음 대사하는 사람이 감정을 쌓아갈 수 있게 도와줬다. 이런 사람 덕에 모두가 흐름을 타서 대사를 재미있게 주고받는 순간이 오리라 믿었다.


이 모든 걸 차치하고서, 자신이 맡은 역할의 대사를 정확히 숙지하는 건 중요하다. 학생들은 이 수업 말고도 해야 할 것이 많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과제도 해야 하기에 기초연기 수업은 뒷전이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대사를 외워오라고 시키지 않으면 실제 연극에서 대사를 까먹어 정적만 이어지는 대참사가 일어날 테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바로 나였다.


"저희 배우장 할 사람을 정해야 하는데.. 어디 보자. 가장 학번 높은 사람이... 오 19학번 학생이 있네요! 자 다들 박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생들은 나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걸 무슨 수로 거절한단 말인가... 그렇게 나는 배우장이 되었다. 다들 연극 올리는 게 처음이실 테니 제가 한 번 열심히 해 보겠다는, 배우장이 된 소감도 말했던 걸 보니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렸던 게 확실하다.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충만해서 역할을 덥석 물었는데, 물고 보니 배우장이 뭐 하는 건지를 모르겠어 곧바로 질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다고 말하기 전에 질문을 먼저 할 걸 그랬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뭣하리...


"근데 배우장의 역할이 뭔가요 교수님..?"

"말 그대롭니다. 배우를 대표하는 사람이죠!"


분명 배우를 대표하는 사람이긴 하겠다만... 어떤 부분을 대표하라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해야 했다. 기초연기 수업은 이번에 처음 개설되었으니, 학생들끼리 연극을 올려야 하는 상황에서 배우장을 맡은 사람은 내가 최초였다.


그리고, 정말 배우장 노릇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는 그 누구도 대사를 완벽히 외우지 않았던 때인 공연 개시일 2주 전이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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