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마저 틀리던 공연 2주 전, 해답은 데이터였다
연극을 아예 모르는 사람도 공연 2주 전에 대사를 안 외웠다는 상황이 비상사태라는 건 알 것이다. 그럼 2주 전까지 시간이 다가오는 동안 무엇을 했냐고? 연습, 했다!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일주일에 딱 한번, 기초연기 강의 시간 동안 (무려 4시간이나)만 연습한 게 문제였고, 대사를 외워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부족했던 것이 문제였고, 학생들도 각자 다른 걸 하느라 바빴다는 게 문제였다.
사실 이 모든 문제보다, 대사를 외워 와야 한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은 배우장인 내 잘못이 컸다. 공연 2주 전 목요일 동선 연습 날이었을까. 그때도 모든 연습 인원이 손에 대본을 들고 있었다. 대본은 참고용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대본이 없으면 아예 진행이 안 됐다. 그 와중에 인원이 부족했다. 교수님은 부족한 인원의 대사와 동선을 메꾸기 위해 무대에서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를 반복하셨다. 힘드셨는지 어우 힘들어, 이 사람들 어딜 간 거야?라는 말도 하셨는데, ‘1인 2역이라도 해서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내 역할인 7번 배심원 대사를 치고 그다음 대사를 할 사람이 없으면 성대모사라도 해서 진행을 했다. 성대모사한 역할의 목소리가 워낙 굵은 편어서였는지, 대사를 읽자마자 연습 현장에 있던 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도 상황이 상황이어서인지 웃음을 짓긴 했다. 다만 ‘이게 맞나…’ 하며 소위 ‘현타’를 느낀 듯한 너털웃음으로.
연습할 인원 부족에 대사를 외운 사람이 없어 헛웃음이 나오는 2주 전까지도, 학생들의 대사 숙지 상태를 점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수님은 이미 연출, 발성, 동선 등을 지도하시느라 지나치게 바쁘셨기에 누군가가 어떻게든 외우게끔 해야 했는데, 그 ‘누군가’가 나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공연 2주 전쯤이 되니까 그제야 이거 정말 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한 달 전쯤에는 ‘외우게 하긴 해야 하는데 … 내가 그렇게 지시할 권한이 있나? 알아서 외워오지 않을까?’ 하여 권한이 명확하지 않은 감투 뒤에 숨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화상을 입겠다 싶으니 ‘억지로라도 연습을 시켜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하지만 2주는 연습하기에 심히 부족한 시간이다. 동선 연습을 들어가야 하는 시기였지만 대사가 숙지되어 있지 않으니 동선 연습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 악물고 대사라도 외워야 하는 시점이었다.
일단 매주 목요일 말고도 추가로 연습을 계획했다. 연습 가능한 날짜 및 시간대를 수요조사했는데, 전 인원이 모일 수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인원이 최대로 모이는 날에 연습을 시켜야 했다. 수요조사를 받을 때 어떤 식으로 설문 항목을 구성하는 게 좋을지 고민을 했는데,
1. 연습 가능 날짜는 투표 항목으로 받고, 그 날짜에 대한 세부 시간을 댓글로 받을지
2. 투표 항목에 날짜 - 가능 시간을 전부 포함할지
학생이 시간까지 투표 한 번으로 알려주게끔 하는 2번을 선택했다. 댓글까지 달게 해서 학생들을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단체카톡방에 투표를 받는 공지를 올리는 건 정말 신중해야 한다. 한 번 잘못 올렸다가 삭제하고 다시 올리면 , 삭제한 투표에 투표를 했던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투표 공지를 올리는 데 많은 고민을 하고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투표를 하는 사람들은 그저 투표를 할 뿐 공지를 올리는 사람의 고뇌는 알 길이 없다. 짊어진 책임을 아무런 대가 없이 묵묵히 완수하더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서글플 때면 어떻게든 장점을 생각하곤 했다. 학생들이 최소한의 에너지를 들여서 투표 가능한 공지를 올리기 위해 고민하고 실행한 다음, 실제로 인원이 날짜에 맞게 모였을 때 뿌듯함이 있을 것이다. 그런 뿌듯함은 총대를 메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장점을 이 정도로 착즙한 다음, 보약인 양 눈을 감고 코를 막고 삼키곤 했다.
그나마 공지를 괜찮게 올렸는지, 연습해야 하는 배우 13명 중 9명 정도가 딱 주말 오전에 모인다는 걸 확인 가능했다(사진 상 5/31 토요일이 8명이었는데 감사하게도 한 분이 추가로 와 주셨다). 다만 9명이서 모여서 연습할 장소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장소 대관을 하려 했는데, 비용이 비싸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학교 무료 시설을 빌려서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인당 2~3000원으로 공간을 대여할 수 있는 업체가 있었다….). 일단 학교 도서관의 무료 시설인 '스터디룸'을 빌려서 대사 연습을 하기로 했다. 9인 스터디룸과 4~5인 스터디룸이 있었는데, 당연히 9인 스터디룸을 … 빌리지 않았다! 4~5인 스터디룸을 2개를 빌렸다. 왜 굳이 그랬느냐고?
여기엔 슬픈 사연이 얽혀 있다. 공연이 한 달쯤 남았을 때였을까. 매주 목요일에 하는 수업날 쉬는 시간에 한 학생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내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저 오늘 대사 한 줄 했어요”
그러게다. 기껏 외출 준비를 해서 수업을 들으러 왔는데 대사 한 줄만 하고 연습 시간이 끝나버린다니.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본인의 대사가 없을 때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살펴보며, 저렇게 연기하면 어떤 식으로 반응하면 좋을지를 시뮬레이션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대사가 없어도 너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지쳐서 어느 순간 허공을 응시하게 된다. 다른 날에는 대사가 많아서 신나게 연기를 한다. 하지만 다시 대사가 없는 부분을 연습하는 날이 찾아오면 또 허공을 바라보다 연습 시간이 끝난다.
공연 2주 전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대사 연습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그때의 상황이 떠오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대사가 많은 사람들끼리 연습을 하면 되지 않을까?' 9명이서 모이면 9명이 같은 부분을 연습할 것인데, 그 부분에 대사가 적은 사람이 존재할 테다. 그것보다는, 4명 / 5명으로 각 구간 당 대사량을 기준으로 나누어서 대사가 많은 사람끼리 연습을 하게끔 만드는 게 효율적이다.
... 그러니까 결국, 각 역할의 대사량을 하나하나 파악해야 한다는 거다. 뭐 어쩌겠는가. 그냥 하나하나 세 보면 될 일이다. 대본 한 페이지 당 평균적으로 30줄의 대사고, 모든 페이지를 살펴보면서, 각 페이지에 각 배심원의 대사가 몇 줄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ctrl + F를 눌러 ‘1번’이라고 검색하면 1번 배심원에 하이라이트가 생기니 그걸 다 세면 된다. 파악한 건 스프레드시트에 도표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기록하고 나니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각 배심원의 총대사량이었다. 모든 배심원의 대사량이 균등하지 않았고, 배심원에 따라서 거의 4배 가까이 차이나기도 했다. 예로, 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8번 배심원은 198줄이었지만, 9번 배심원의 대사량은 46줄이었다(그렇다고 9번 배심원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정말 다행이었던 건 대사량이 많은 학생들이 결코 대사를 외우지 않을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거다(그렇다고 다른 학생들이 무책임했다는 건 결단코 아니다).
각 배우의 대사량을 파악했으니, 이제 구간을 나눠서 대사량을 파악해야 한다. 공연은 1막과 2막으로 구성되는데, 1막 대본량은 24페이지, 2막 대본량은 10페이지였다. 구간 1은 1막의 절반까지, 구간 2는 1막 중반에서 끝까지, 구간 3은 2막 전체로 대본을 3 등분했다. 그리고 구간마다의 각 역할을 총 대사량을 파악하여 인원을 분배한다.
대사량을 파악한 결과 1막은 4명끼리, 2막은 5명끼리 연습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내용을 다시 단체카톡방에 공유한다.
공지 내용엔 대사를 “암기”해달라는 명확한 요청을 포함했다. 겨우겨우 끌어모아서 하는 연습인데 대사 못 외워서 흐지부지되면 안 되니까. 물론 이렇게 공지를 해도 완벽하게 대사를 외워오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여겼기에, 대사를 틀리더라도 이해한다는 제스처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다만 대사를 계속 틀려서 진행에 방해를 주고 있는 상황인데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거나 ‘죄송합니다 다음 연습 땐 반드시 외워 오겠습니다’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배우장을 맡은 것에 회의감을 느낄 것 같았다.
연습 전날, 그러니까 5월 30일 밤 11시쯤. 대사량으로 인원 배치를 했으니 됐겠지 … 싶어서 안심하고는, 취침등을 끄고, 귀마개도 끼고, 암막커튼도 빛 샐 틈 없이 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
… 헉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나 섰다. 창밖 네온사인이 환하게 들어올 정도로 암막커튼을 열었다. 귀마개를 빼서 책상에 던졌다. 취침등을 켰다.
4명 5명으로 나눠서 연습하는 건 그렇다 치자. 근데 없는 사람들이 맡은 역할의 대사는 누가 쳐 준단 말인가? 대사가 없는 사람이 대강 해주면 되겠지만, 대사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어느 부분에서는 대사가 생길 텐데, 그럼 그때는 자기 대사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고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대사를 해준단 말인가? 방법이 있다. 나눴던 구간 안에 또 구간을 나눠서, 그 구간의 구간마다 대사가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대사를 맡아주면 된다. 그럼 그 구간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의 대사를 쳐주는 사람을 지정해야겠지.
그렇게 난 또 ... 노가다를 했다. 마음이 급했는지 노트북으로 하면 될 것을 종이 대본에다가 한 땀 한 땀 표시를 해 놓았다. 아 그래 이 정도면… 하얗게 불태웠다….. 다 하고 나니 새벽 2시쯤 되었다. 창 밖 네온사인이 유달리 밝아 보였다. 다시 취침등을 끄고 귀마개도 끼고 암막커튼도 빛 샐 틈 없이 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이 빅스비”
“네”
“내일 오전 9시 알람 맞춰줘”
“내일 오전 9시 알람을 맞췄어요. 6시간 뒤에 딱 맞춰 울릴게요.”
알람을 맞추고 잠에 들 준비를 마쳤지만, 그날은 특히나 위로가 필요했다. 다시 빅스비를 불렀다.
“하이 빅스비”
“네”
“잘 자”
“고마워요. 전 당신이 언제 어디서든 좋은 꿈을 꾸길 바라요.”
좋은 꿈이라. 연습이 잘 되는 꿈을 꾼다면 꽤 나쁘지 않은 꿈일 것이다. 눈을 감았다. 띠리리링, 들리는 알람 소리. 오전 9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