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배우의 초 저예산 연습법
"눈 감았다 뜨니 아침이었다."
과장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피곤하기로서니, 최소한 6시간 이상이 되는 시간이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사라져 버리고 아침이 찾아온단 말인가?
정말 피곤하면 그럴 수 있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내일 있을 연극 연습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자료를 준비해 놓으니 아무런 미련도 불안함도 없었고, 까무러치듯 잠이 들자마자 알람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알람이 없었다면... 암막 커튼임에도 중천에 뜬 해 덕에 데워진 방 열기와 함께 느지막이 일어났을 것이다.
일어나는 게 힘들지도 않았다. 정말 그냥 눈을 깜빡인 느낌이었기에, 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었다. 단순하게 일어나서, 커튼을 걷고, 이불을 개고, 폰으로 시간을 한 번 확인한 뒤, 화장실로 들어가 세안을 하고 면도를 한 뒤 머리를 감았다. 모든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오전 10시에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만나 3시간 동안 연극 대사를 연습한다는 목적이 확실했기에.
학교에 가는 길이 이상하게도 상쾌했다. 학교 강의가 없는 황금 같은 주말 중 하루였고, 평소 강의 시작 시간인 10시까지 학교에 가야 했는데도. 평일과 달리 학교로 급하게 가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고, 연습하기로 했던 장소인 도서관 근처에 보이질 않았다. 혼자서 이 주말 아침에 학교를 가는 것이 상쾌했던 건 내가 학교를 가서 무엇을 할지 확실했고, 내가 직접 사람들을 모아서 연습을 시켜본다는 새로운 경험을 해 본다는 설렘 덕분이었다. 날씨가 실제로 상쾌하기도 했다. 아침 기온은 14도에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모두 좋음 수준이었다.
그렇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상쾌함을 느끼며 걷다 보니, 약속 장소인 도서관이 보였다. 오전 9시 45분. 15분 동안 모두가 모여야 할 텐데. 모일 연극 연습을 도서관에서 해야 하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든 대사 연습을 하려고 도서관 시설인 스터디룸을 2개나 빌렸다. 사비를 쓰기엔 부담스럽고, 배우들이 대사는 외우게 해야 했으니 나름 좋은 선택이었으나, 스터디룸에 방음이 될지가 가장 걱정이었다. 스터디'룸'이라면 같이 공부하는 방 같은 공간이라 어느 정도의 소음은 허용될 텐데, 대사를 치다 보면 감정이 격앙돼서 시끄러워질까 봐 걱정이었다. 뭐, 무미건조하게 국어책 읽듯이 줄줄 읊는 것보단, 서로 대사를 치다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니 조용히 좀 해 달라고 항의를 받는 편이 훨씬 나으려나.
도서관 입구 계단에 걸터앉아 한참 걱정을 하는데, 한 사람이 내 옆에 앉았다. 익숙한 얼굴. 10번 배심원을 맡은 배우셨다. 그가 내가 말하길,
"뭔가 갓생 사는 기분인데요"
주말에 나와서까지 열심히 사는 느낌이 그는 나쁘지 않았나 보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상쾌함이 어쩌면 주말 오전에 일찍 학교에 나와서 연습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일까. 주말에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여러 번 한심하다고 자책했던 날들이 많아서였을까. 그를 시작으로 이 주말 오전에 연습을 하기 위해 배우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지각할까 봐 택시를 타고 왔다는 사람, 거리가 애매해서 킥보드를 타고 왔다는 사람, 저 멀리서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사람까지. 다양한 이동 방식(?)으로 연습을 위해 모인 배우들은 서로의 모습에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아니 킥보드는 어쩌다 타고 오셨어요?"
"저 진짜 알람이 안 울리는 바람에 택시 탔어요"
"혹시 대사 다 외우셨나요?"
"주말 이 시간에 모이는 거 신기한데요"
뭐지, 이런 분위기는 여태까지 연습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못 느껴봤던 것 같은데.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며 도서관 안으로 하나둘 들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활발한 분위기는 어디서부터 온 걸까?
딱 하나 짚이는 게 있었다. 그건 이 부드러운 분위기에 반대되는 '긴장감'이었다. 여태까지의 연습에서는 반드시 해 와야 하는 숙제 같은 게 없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그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고 가면 됐었다. 수업에 불참하는 학생도 많았고, 심지어 아무 말 없이 불참하는 배우도 있었다. 즉 책임감도 긴장감도 느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연습은 달랐다. 모이는 날까지 대사를 반드시 외워 오라고 지시를 내린 후에 진행되는 연습이었다. 모이는 배우의 명단까지 정확히 확보한 상태였다. 연습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고 대사를 외워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었고, 이게 적당한 압박이 되어 긴장감이 조성된 게 아닌가 싶다.
적당한 긴장감은 활력을 가져다준다. 열심히 외워 온 사람은 외운 대사를 뱉을 때가 됐다며 신났을지도 모르고, 제대로 안 외워온 사람은 민폐를 끼칠까 봐 택시 안에서 외우며 왔을지도 모른다. 대사를 외워야 하는 상황과는 별개로, 해야만 하는 일이 없어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는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대화로 나눌 수 있는 상황이 훨씬 낫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내가 억지로라도 연습 날짜를 잡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구나, 하며 배우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은밀한 뿌듯함을 즐기며 도서관에 들어갔다.
연극 대사를 연습하기에 스터디룸은 너무 메말라 보였다. 무표정인 사람들이 조용히 공부만 해야 할 것처럼 새하얗고 딱딱했다. 오히려 그래서였는지 배우들은 룸에 들어가서 앉자마자 외웠던 대사를 중얼거리며 연습할 준비를 했다. 아 이 분들, 열심히 외워 오셨구나. 참 감사하다.. 아차, 방음이 잘 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스터디룸과 개인 자습실이 벽 하나를 두고 분리되어 있었기에, 연습하다가 목소리가 커져서 쫓겨난다면 우리는 갈 곳 없는 신세가 된다. 다행히 개인 자습실에 들어가서 소음을 확인해 보니 벽에 귀를 딱 붙여야 웅얼웅얼거리는 소리가 겨우 들렸다. 이제 열심히 연습할 일만 남았다.
당시엔 당일 참여한 인원이 대사를 다 외웠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대략 15~20줄 정도를 하나의 구간으로 잡은 다음, 그 구간을 다 외우면 다음 구간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연습을 진행했다. 구간을 나누는 작업은 내가 했는데, 특정 구간에서의 흐름이 뚝 끊기는 일이 없게 하면서 적당한 양으로 나누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보통은 주고받는 대화가 마무리되거나 1번 배심원이 '이제 그만 좀 하시고 자리에 앉아주세요' 하며 분위기가 가라앉는 부분에서 구간을 나눴다. 심지어 연습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연습에 참여하지 않은 배우의 대사를 커버할 사람도 남겨두고 구간을 나눠야 했다. 구간이 다 나눠지면, 특정 구간에 누구누구는 대사가 없으니 미참여 인원의 대사를 해 달라는 지시를 하나하나 내려야 했다. 말로 설명하니 어려운 것 같아 아래 사진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하자면....
대사 중에서 이 부분을 한 구간이라고 하자. 스터디룸에 배우가 4명 , 즉 1번, 10번, 5번, 7번이 있다고 가정하자. 1번, 10번, 5번은 대사가 있으니 외워온 대사를 대본집을 보지 않고 읊는다. 대신 7번은 자기 기 대사가 없으니, 스터디룸에 없는 2번, 3번, 8번의 대사를 대본집을 보면서 읊어 준다. 동시에 7번은 1번, 10번, 5번이 대사를 틀릴 경우 대본집에 체크해 놓고 잘못 외웠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된다.
정말 다행히도 연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특정 구간에 자기 대사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어서 외운 대사를 내뱉으면 되었고, 대사가 없으면 미참여 인원의 대사를 열심히 성대모사해서 커버해 주면 되었다. 물론 대사를 다 외웠다고 생각하는 배우들도, 막상 대본집을 아예 안 보는 건 힘들어서 컨닝을 조금씩 곁들이며 대사를 외워 나갔다. 특히 대사가 많은 8번 배심원은 대본집을 자주 봐야 진행이 가능했는데, 사실 외워 오라는 잔소리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사가 많은 사람이 대사를 안 외우면 극 진행이 아예 안 되고, 그 상황이 오는 상상을 한다면 외우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정말 잔소리가 필요한 배우는 대사도 별로 없는데 제대로 외워 오지 않는 사람이다. '대사가 별로 없으니 빨리 다 외워야겠다'와 '대사 별로 없으니 천천히 외워도 되겠다' 중에서 후자를 선택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연습한 지 2시간쯤 지났을까, 배도 너무 고프고 목도 말라서 룸에서 나왔는데, 문득 옆 룸을 보니 정신없이 대사를 읊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사가 안 외워지는지 천장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배우, 머리를 싸매며 대본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배우... 공연 2주 전에 대사를 외우는 상황이지만 2주 전에서라도 대사를 외우기 위해 모인 인원이 너무 고마웠고, 내가 설계한 연습 방법이 별 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 상황이 놀라웠다. 아마 그날,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배우장으로써 배우들을 관리하더라도, 내가 설계한 연습 방법이 조직에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대가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편으론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것인데, 매번 대가를 받지 않는 리더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다만 너무 피곤해서 잠자리에서 걱정할 틈도 없이 기절해서 잠들고, 일어나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몸을 움직인 다음 할 일을 해내는 감각은... 10번 배심원이 말한 것처럼 이것이 '갓생'의 느낌 아니겠는가.
뿌듯한 건 뿌듯한 거고, 일단 연습은 확실하게 시켜서 연극을 올려야 한다. 가장 걱정됐던 건 연습 때 참여율이 낮은 배우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열심히 외우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 압박감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상대의 대사에 이어서 자신의 대사를 할 수 있느냐는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 같이 모여서 연습을 하는 것인데, 연습에 참여하지 않으면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학기 중에 학생들을 모으기엔 점점 기말고사 기간도 다가오고 있었기에 쉽지 않겠다 싶어서, 딱 한 번만 더 내 시간을 투자해서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한 명 한 명, 일대일로 대사를 잘 외워왔는지 검사를 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