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배우들의 대사 숙지 상태를 검사하며 배운 점
오후 2시. 이제 3시간 동안은 카페에서 나갈 수 없다. 연극 공연은 2주 남았고, 자신의 대사를 완벽히 외운 배우는 없고, 다들 대학교 수업을 듣느라 같은 시간에 모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배우장인 나는 스스로를 카페 안에 가두어 배우가 한 명씩 찾아오면 대사를 잘 외워 왔는지 검사하기로 한 것이다.
찾아오기로 한 배우는 알고 있지만 정확히 몇 시에 찾아올지는 모르기에 카페에 가만히 앉아 대본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도 전문 배우가 아니라 그저 학생일 뿐이니 연기력을 평가할 깜냥은 안 된다. 대신 대사를 정확히 외우고 있는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연기를 못 하더라도 대사를 정확히 내뱉어야 다음 사람이 대사를 할 수가 있다. 물론 그다음 사람도 전 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반응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대사가 틀어지면 초보 연극배우가 겨우겨우 외운 대사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질게 분명했다.
오늘은 긴 싸움이 될 것이니 천천히 마실 수 있는 뜨거운 차를 한 잔 시켰다(한여름이었다). 대본을 한참 넘기다가 몇 번이고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보니 지루해져, 잠깐 창문을 봤다. 익숙한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4번을 맡은 배우였다. 약속 시간인 2시 30분보다 5분 일찍 등장하더니, 나보고 고생이 많다며 쿠크다스 두어 개를 건넸다. 그게 얼마나 감동이던지. 아직 대본 검사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물론 너그러워진 마음과는 별개로 대사를 틀린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체크해야 했다. 4번 배우도 부족함이 있었지만 대사를 절 때마다 아쉬워하고 내게 미안해했다. 특히 장대사의 경우 두어 문장은 쭉 읊다가, 이어지는 문장의 첫마디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답답하다는 듯 그... 그...!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이?' 하고 첫마디를 던져주면 '아!' 하고 찌푸린 얼굴이 환하게 풀리고는 곧바로 이어서 대사를 했다. 열심히 외웠다는 티가 나서인지 '지금 공연 2주 남았는데 어떡할 거예요?' 같은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알바가 있는데, 알바 하면서 어떻게든 외워 오겠다고 했다.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는 대학생을 몰아붙일 자격이 내게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사 검사가 끝나고 시간을 확인하니 2시 55분쯤이었다. 쿠크다스는 부스러기가 떨어질까 신경 쓰여 나중에 먹어야겠다 싶었고, 잘 먹겠다고, 다음 수업 잘 들으시라고 인사를 하니 그는 간단한 목례를 하고는 카페를 벗어났다.
4번 배우가 나가자마자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음으로 검사받는, 3번 배심원 역할을 맡은 배우였다. 저 두 분은 언제 저렇게 친해졌나? 싶을 정도였는데, 사실 이번에 검사받는 배우는 내가 봤던 사람들 중 길거리에서 춤을 시켜도 곧바로 춤을 출 만큼 극도로 외향적인 사람이라, 누굴 만나도 붙임성 있게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아유 배우장님, 반갑습니다. 고생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시작해 볼까요?"
문제는 그 에너제틱한 성향이 대사를 외우는 스타일에도 적용되어서, 정확한 암기보단 넘치는 기세로 대사의 뉘앙스만 습득한 상태라는 거였다. 3번의 대사에서 "뭘 어떻게 해 볼 게 없다니까요."를 "뭘 더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분명 목소리나 몸짓으로는 대본에 나온 대사의 맥락을 잘 표현하고 있었지만, 어찌 됐든 정확히 대사를 외워야 실전에서 정확히 내뱉을 수 있을 거라고 교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사실 이런 틀린 지점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것이 껄끄러울 때가 있었다. 아무리 대사를 외운 걸 검사한다 하더라도 '굳이 이것까지 지적해야 하나?' 같은 부분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어린애'를 '어린놈'으로 말한다거나 '왜 그런 겁니까?'를 '왜 그런 거예요?'로 말한다던가 하는 경우였다. 그래도 지적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잘못 말해서 그다음 사람이 대사를 못 내뱉는 것보단 나으니까.
"배우장님 죄송합니다, 다음번엔 진짜 다 외워오겠습니다. 화이팅합시다! 화이팅!"
그는 풀 죽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높은 텐션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나는 그의 텐션을 감당 못한 채 3번 배우의 검사가 끝났다. 배우 두 분만 검사했지만 이 분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대사를 외우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또한 그런 태도가 배우장인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나를 믿지 않았다면 정해진 시간에 검사를 받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 미안해하는 게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배우장인 나도 배우가 반드시 공연 당일까지는 반드시 대사를 다 외울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믿음은 사람 덕분에 유지되었다가 사람 때문에 깨지기도 한다. 3번 배우의 검사가 끝났을 때가 3시 30분쯤 되었는데, 오기로 한 배우가 오질 않았다. 혹시 어디쯤이냐고 카톡으로 물어보니, 가고 있단다. 만나야 할 시간에 가고 있다니? 뭐 10분 안엔 오겠지... 해서 30페이지짜리 대본을 다 훑어봤는데도 오질 않아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약속시간보다 20분이 지나 있었다. 슬슬 열이 올라서 언제 오나 보자... 하면서 카페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각을 할 거라곤 예상을 했다. 연기 수업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지각을 하는 사람이었고 가끔씩 아무런 연락 없이 연습에 불참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전 타임의 배우 대사량의 절반도 안 되는 대사를 다 외우지 않고 나를 만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짧은 대사임에도 자신의 타이밍을 놓쳤고, 긴 대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검사는 진행이 되지 않았다. 짧은 대사를 잘못된 타이밍에 내뱉는 게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째 반복될 때쯤, 그냥 대본을 덮어버리고는 말했다.
"대사가 많으신 분들은 대사를 다 못 외웠어도 이해합니다. 근데 5번 배우님은 대사도 얼마 없는데 왜 다 못 외우신 거죠?"
그는 내 눈을 피했다. 표정을 보니 머쓱해하긴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5번 배우님은 일주일 뒤 추가적으로 대사 잘 외웠는지 만나서 검사 진행할게요. 이제 가셔도 됩니다"
그는 간단한 목례를 하더니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정말 얄궂어 보였다. 어떤 사람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오는 데다 자신이 대사를 다 못 외워 오면 사과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지각을 하고 대사를 안 외워와도 사과 한 마디 없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도 태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5번 배우를 맡은 사람을 보내고 난 다음 바로 내일 검사할 배우를 위해 다시 대본을 살펴봤지만, 대사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5번 배우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만 생각했다.
어쨌든 끝이 났으니 과자라도 먹기로 했다. 4번 배심원을 맡은 배우가 고생한다며 주고 간 쿠크다스. 옆구리를 좍 뜯으니 부스러기를 토해내며 대본집을 더럽혔다. 너무 거칠게 뜯었을까? 상관없다. 대본 검사가 끝났으니 여유로운 마음으로 손바닥을 펼쳐 부스러기를 흩어내고 쿠크다스 본체(?)를 맛있게 먹으면 될 일. 과자가 맛있으면 부스러기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배우장을 맡는 이유도 쿠크다스를 먹는 이유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우장을 맡는 나의 고생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지각하고 대사도 안 외워왔는데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배우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쿠크다스가 아무런 부스러기 없이 깔끔하게 뜯어지면 좋을 텐데. 또 한편으로는 내가 깔끔하게 쿠크다스를 뜯으면 부스러기를 감수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내가 잘 못 뜯은 걸까? 아니면 애초에 약한 쿠크다스라 부스러기를 피할 수 없는 걸까?
남은 쿠크다스가 있어서, 이번엔 진짜 조심스럽게, 천천히, 절대 부스러기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뜯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부스러기는 대본집을 더럽혔다.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내가 배우장으로서 열심히 배우들을 통제하려 하더라도 배우의 돌발 행동은 통제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그런 부스러기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배우장으로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그렇게 5시 10분쯤 카페를 빠져나왔다. 학교 캠퍼스가 노을 덕분에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틈도 없이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다음은 홍보 포스터 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