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포스터,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들기
"교수님, 저희 연극 포스터는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까요?"
공연 한 달 전이었지만 포스터를 누가 만들지도 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연극을 가르쳐주시는 교수님께 먼저 말씀드릴 정도면 말 다했지. 순진했던 나는 포스터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수업에 있는 분들이 진지하게 의논하는 분위기를 형성해 줄 줄 알았으나,
"역시 배우장이네요. 포스터에도 관심을..!"
교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옆 사람들이 날 쳐다보며 박수를 치기 시작하고, 몇몇 사람은 오~ 하며 대단하다는 듯 감탄사를 연발했다. 물론 공연 한 달 전에는 교수님과 함께하는 매주 목요일 정규 강의시간 말고는 추가 연습을 안 하고 있었고, 배우장으로서 하는 건 그다지 없었어서 대강 멋쩍은 웃음을 짓고 넘겼다. 뭐, 내가 만든 포스터가 흥미를 이끌어 연극을 보러 오게 한다면 그만큼 뿌듯한 일이 있을까?
이왕 포스터를 만드는 김에 제대로 만들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12인의 성난 사람들> 포스터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워낙 자주 공연화됐던 극이다 보니 검색을 조금만 해 보면 여러 디자인이 나왔고, 그 디자인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건 독창성이 결여된 인간 같았다. 그리고 첫 연극의 포스터를 만드는 건데 나름 공을 들여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포스터의 특징을 살펴본 결과 공통점이 있었다. 유일하게 아버지를 칼로 찌르고 달아난 것으로 의심되는 소년을 12인의 배심원 중 유일하게 '무죄'라 주장하는 8번 배심원을 포스터에 의미심장하게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다 같이 계단을 올라가는데 8번만 뒤돌아보고 있다거나, 12개의 의자 중 하나만 빨간색이거나, '유죄' 글씨를 죽 나열하고 '무죄'를 빨간색 글씨로 딱 하나 집어넣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디자인과 겹치지 않으면서, 8번 배심원이 '무죄'를 주장한다는 점을 포스터에 표현하는 게 포인트였다.
간단한 시안일지라도 기존에 있는 포스터와 겹치지 않게끔 3개나 만들었다. 사람이 나오지 않는 1,2번째 시안과 사람이 나오기에 추가 촬영이 필요한 3번째 시안. 이렇게 총 3개의 시안을 교수님께 보여드렸는데,
"아무래도 배우들의 모습이 직접 나온 3번째 시안이 좋을 것 같아요. 첫 연극이니만큼 여러분의 모습을 직접 담은 포스터를 남기는 게 추억 남기기에도 좋지 않을까요?"
일리가 있었다. 이번 공연이 배우들에게는 첫 연극이자 마지막 연극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왕이면 포스터에 배우의 모습을 모두 담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포스터에 나오게 하려면 아무리 배우장이더라도 혼자 힘으론 역부족이다. 심지어 3번째 시안을 배우들이 좋아할 거란 보장도 없다. 그제야 '포스터에 관심을 보이다니!'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뇨 제가 꼭 만든다는 게 아니라요, 앞으로 어떤 식으로, 누가 포스터를 만들지 의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멋쩍게 웃지 않고 내 의사를 정확히 표현했다면, 이 일이 구성원 모두의 일임을 알릴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도움을 청하자 다짐하고는, 곧바로 카톡으로 연출부장님에게 연락을 드리고자 폰을 잡아들었다. 텍스트를 지웠다 썼다를 5번은 반복하니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왔고, 용기를 쥐어짜내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배우장 000입니다. 혹시 연출부 쪽에서 포스터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안읽음 표시 1을 확인하고 곧바로 채팅창을 나갔다. 채팅창 리스트 화면에서 5분 정도를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 괜히 보냈나...? 그래도 나름 용기 냈으니 됐지 뭐...'
폰을 침대 쪽으로 던지자마자, 카톡! 바로 침대에 뛰어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크게 얘기된 건 없습니다."
그 뒤로는 연출부장님 의견은 어떠신지 물었고, 사람이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하셨다. 다만 나머지 연출 두 분의 의견을 듣지 못했기에 연출부의 상황을 물었다.
"혹시... 연출부장님 혼자서 연출 쪽 관리하고 계신가요...?"
"네 아무래도요..."
"그렇군요... 나머지 2분도 도와주시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요..."
아마 연출부장님도 나와 비슷한 상황인가 싶었다. 같은 연출부 분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그냥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일을 쳐내고 계시는 걸까. 그래서 카톡으로 먼저 연락하는 용기를 낸 김에, 딱 한 번만 더 새로운 액션을 취하기로 했다.
"그럼 제가 연출부 단톡방 하나 만들까요?"
좋다고 하셔서 그제야 연출부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공연 일주일 전이 되어서야 연출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연락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포스터는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까요?' 같은 질문을 카톡방에 남기니. 여태까지 연습 때마다 묵묵히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던 연출부 2분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포스터 색깔은 어떻게 할까요?"
"촬영 장소는 어디서 하는 게 좋을까요?"
"12인의 성난 사람들 글씨 폰트는 어떤 게 좋을까요?"
심지어 아무 말 없이 개인적으로 포스터 초안을 만들어서 카톡방에 보내놓기도 했다. 이전에 진행된 연극의 포스터의 퀄리티와 하등 다르지 않은 퀄리티의 포스터였다.
공연 2주 전까지만 해도 연출부장님을 제외한 연출부 2분은 정기 연습이 있는 날 연습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연극 인원 전원이 포함된 단톡방에 공유하는 것 말고는...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정기 연습 때 배우들의 이런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피드백도, 교수님께서 '연출부 혹시 피드백 줄 거 있나요?'라고 하시면 그제야 한 두 마디 말하는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연출부를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좋은 퀄리티의 포스터가 연출부 단톡방에 짜잔 하고 나타나는 순간, 이런 능력이 있으신데 왜 여태까지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해야 할 일을 부여받으면 해낼 능력이 있는 분들이었지만, 여태까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소극적으로 보였던 게 아닐까.
내가 포함된 연출부 단톡방이 활발해진 걸 확인하고 나니 한시름 놨구나 싶었다. 더 이상 이 연극을 올리기 위해 혼자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아니, 노력하더라도 혼자서만 고민하는 건 나에게도 단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파렴치한 사람들이라 의견을 내도 묵살당할지도 모르지만, 그걸 알기 위해선 적어도 알리기는 해야겠구나. 연출부장에게 카톡을 남기고 단톡방도 만들면서 연출부도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내가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담이 줄어들지 않았나.
그렇게 연출부와 의견을 나눈 결과, 배우가 모두 나온 포스터를 찍기 위한 장소가 정해졌다. 도서관. 이 조용한 장소에서 대사 연습을 하는 것도 모자라 촬영까지 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