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공연에서 대사를 놓쳤다

무대 위 3분의 정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by 사육일칠

연극 시작 10분 전. 무대 뒤 대기실 어둠 속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대본집을 살펴보는 동안 관객이 웅성거리며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께서는 극 시작 시각인 오후 6시 5분 전이 되면 신호를 줄 테니, 무대 뒤 대기실에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끔 대기하라 하셨다.


신호를 받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대사를 외울 수 있는 최후의 시간이 주어졌다. 마치 암기 과목 시험을 앞둔 학생들처럼 어떻게든 머릿속에 대사를 집어넣으려고 읊고 떠올리기를 반복했다. 이전엔 자기 대사를 상대 배우에게 느닷없이 던지기도 하는 등 여유롭게 장난도 쳤지만, 이제는 서로에게 말을 걸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관객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대사는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래, 시험 직전에 급하게 외우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간 배우들의 대사 숙지 상태를 체크하느라 너덜너덜해진 대본집을 바닥에 내려놓고, 남은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스읍.. 후우.. 하면서 심장이 좀 진정되나 싶으면 다른 배우들이 대사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어오는 덕에 긴장을 즉시 불어넣어 줬다.


시작 약 3분 전. 대기실에서 무대로 향하는 통로 끝에서 교수님이 나타나셨고, 손짓을 하셨다.


'(작은 목소리로) 나오세요'


보통 관객들은 배우들이 무대 뒤편에서 등장한다고 예상하겠지만, 우리는 관객이 들어왔던 입구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또한 극장 입구에서 대기하는 배우를 마주해 스포(?)를 당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관객을 들이고 난 다음 연극이 시작되는 오후 6시 5분 전이 되어서야 배우들을 입구에 대기시킨다. 그런 뒤에 배심원들이 재판을 위한 장소에 등장하듯 배우들이 공연장 입구로 들어오면 관객이 상황에 더욱 몰입하지 않을까,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극장 입구에 서자마자 심장 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릴 만큼 배우 모두가 긴장했겠지만, 가장 긴장했던 사람은 아마 대사가 가장 많은 8번 배우였을 것이다. 다른 역할에 비해 대사가 최소 2배는 많았기에, 이 사람이 자신의 대사를 까먹지 않고 잘하느냐에 따라서 연극이 순조롭게 흘러가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고 해도 방했다.


오후 6시가 되자, 공연장 안에서 극의 흐름을 설명해 주는 안내멘트가 나온다.

"이것으로써 이 사건의 법률적인 검토는 일단락됐습니다. 이제 배심원 여러분께 본 재판관이 마지막 당부를 드리겠습니다. 계획된 살인은 형사법정에서 다뤄지는 가장 중대한 사건입니다..."

수없이 많이 들었던 멘트였다. 만약 내가 정말 프로 배우였다면 이 상황에 몰입하기 위해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이 멘트를 들으면서도 이미 7번 배심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무대에서 연극을 해 본 적이 없는 일개 학생일 뿐이라 패닉에 빠지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와 어떡해요. 진짜 시작하는 거죠? 대사 까먹으면 어떡하죠. 또는 주저앉아서 마른세수를 하는 배우도 있고. 그때 갑자기,


"파이팅!!!!!!"


8번이 갑자기 큰 소리로 (문 너머의 관객이 들을 정도는 아닌 적당히 크게) 두 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파이팅을 외쳤다. 마치 결승전 시작 직전에 소리를 지르며 경기장으로 뛰어나가는 미식축구 선수 같았다. 극 중 8번 배심원은 소리를 크게 지르는 대사가 없는 데다, 8번 배심원을 맡은 사람은 연습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는 차분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떨리게 할 만큼 인생 첫 연극의 중압감은 엄청던 걸까.

... 여러분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1번 배심원께서 대표로 배심원장을 맡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안내 방송의 내용보다는 '고맙습니다'라는 마지막 멘트 나올 때 집중하여 들어갈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문 너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 정말 들어가야 한다. 구 앞에 줄로 선 배우들이 례차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양복을 빼입고는 신문지를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사람, 똥이 마려워서 그 배우를 밀치고 뛰어들어가는 사람, 뭐 이런 델 부르냐며 툴툴거리며 들어가는 람 등 양한 인물들이 들어오는데, 유일하게 크게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어기야 디어 어기이여차!! 승리로 가~잔다~~"


관객들은 갑자기 웬 뱃노래를 부르나 싶어 뒤를 돌아본다. 롯데 유니폼을 입고는 팔자로 걷는, 건들면 꽤나 피곤해질듯한 인간이 무대 중앙을 향해 걸어온다. 부끄러움도 없이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지르는 민폐남이 되는 게 이렇게 한 순간이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민폐를 끼쳐 보리라. 무대 계단을 발을 쿵쿵 구르며 요란스럽게 올라가자마자, 자신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것으로 의심받는 피고인이 무죄일지 아닐지 깊이 고민하는 8번을 신기하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고는 배심원들에게 시비를 걸듯 마구잡이로 껌을 건넨다. 껄렁대는 7번의 역할에 최대한 몰입하기 위해 행동은 거침없이 했다만, 속은진 수준으로 들리고 있었다. 약 50명의 관객이 연극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그 50명을 신경 쓰지 않고서 행동해야 한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이다. 험이 부족한, 아니 아예 없는 나로선 그게 불가능하다는 듯, 당장이라도 껌을 놓칠 것처럼 껌을 건네는 손을 벌벌벌 떨었다.


껌을 건네고 나서도 손떨림이 멈추질 않아서 이걸 어떻게 하나 당황하고 있을 때쯤, 날 보러 온 친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친구들은 평소에 착하고 다정한 내가 무대에서 이런 껄렁거리고 찝쩍대는 아저씨를 연기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길까. 내가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것보다 친구들이 내 연기를 보고 웃음을 참는 게 더 힘들겠다 싶었다. 그래, 쟤들도 이 연극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웃참을 하고 있을 텐데, 연기를 하려고 무대에 올라온 배우가 몰입을 못 하고 손을 떨고 있으면 되겠는가. 지금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에 집중해서 내 대사를 이어나가자 다짐하자, 손 떨림은 멈추고 더욱 껄렁댈 수 있었다. 그러한 내 행동을 접하는 무대 위 배우들은 내 만행(말 끊고 화장실 가버리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한테 냅다 욕하고 짜증내기 등)이 연기임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내게 진심으로 경멸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부터는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때의 나는 야구장에 빨리 가기 위해 재판을 방해하는 7번 배심원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7번 배심원의 몰입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뭔가 대사가 꼬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극 중반부쯤이었다. 초반부쯤에는 떨리긴 했지만 대사를 실수하는 사람이 없어서 연기에 집중할 수 었으나, 중반부쯤에는 대사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건너뛰듯 진행되는 것 같았다. 대본에 나온 대로 대사를 주고받아야 나도 슬슬 이쯤이구나~하고 준비를 할 것인데, 들려야 할 대사가 들리지 않으니 어? 어?하면서 미간을 찌푸리며 어떻게든 내 대사의 타이밍을 찾으려 애써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도 대사의 타이밍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을수록 내 대사에 가까워지고 있음은 확실한데 타이밍을 모르겠으니 서서히 말라죽어가는 듯했다. 마치 어둠 속에 서서 언젠가 공이 날아온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언제 어디서, 얼마나 큰 공이 날아올지도 몰라 받아칠 자신도 없는 상태로 기다리는 느낌이랄까. 결국 무대 위 정적 사태가 일어나기 전의 마지막 대사는 1번 배심원의 대사였다.


"9대 3. 유죄 우세입니다."


무대가 급 조용해졌다. 젠장. 1번 배심원이 현재 투표 상황을 알리는 대사가 한두개여야 말이지. 이전 대사는 다 증발됐는데 유죄 우세라는 대사만 듣고 그다음 대사를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배우들끼리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관객은 눈치를 보는 배우들을 보며 연출이구나 싶을 테다. 딱 2분 정도까지는 말이다. 2분이 넘어가는 순간, 관객도 눈치를 채기 시작한다. 아, 뭔가 잘못됐구나. 대사를 까먹었든 흐름이 끊기든 문제가 생겨서 진행이 안 되는구나. 관객들이 눈치챌 때쯤 되면 무대 위 배우들도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액션을 취하기 시작한.


"뭔 말이라도 해 보세요 (= 그다음에 10번님 대사 아니에요?)."

"무슨 말? 난 할 말 없어 (= 제 대사 아닌데요ㅠㅠ)."

"돌아버리겠네 진짜(= 돌아버리겠네 진짜)"


다들 당황해 죽을만한 상황이지만 당황한 심정이 표정으로 나타나서는 절대 안 된다. 표정으로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그걸 보고 배우들이 대사를 까먹었다고 확신할 것이다. 물론 표정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관객들이 의심할만한 상황이지만, 의심을 확신으로 바뀌게 하고 싶지는 않기에, 혼신을 다해서 당황한 표정을 숨겨야 한다.


하지만 당황한 표정을 숨기더라도 정적이 길어지면 관객은 이 무대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관객이 걱정할 정도로 정적이 길어지고 있다고 생각이 든 후엔 더 이상 서로 할 말도 없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말도 반복하면 더 어색해질 뿐이다.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정적은 3분이나 더 지속되었다. 이젠 틀렸다 생각할 때쯤,


"(11번 대사) 저, 제가 좀 끄적여 봤는데요."


할렐루야. 초특급 구원 투수가 나타났다. 그가 말하는 순간, 모두가 아닌 척했지만 모두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 거다. 11번이 아니었다면 다들 아무 말도 못 한 상황이 계속되다가 그대로 조명이 꺼지고 연극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잠시 조명이 꺼진 다음 작전회의(?)를 한 번 하고 재개했을지도 모르겠다). 속으로 기뻐 죽을 것 같았는데 표정을 숨기느라 애를 먹었다. 그 뒤로는 대사가 문제없이 잘 진행되었고, 나도 다시 7번 배심원이 되어 연극을 잘 마무리했다.


대체 그는 어떻게 그 대사를 자신감 있게 내뱉을 수 있었을까? 한참 뒤 대사를 뱉어서 중요한 장면이 모조리 생략되면 어쩌려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대사가 끊긴 시점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자신의 대사를 찾아내어 자신 있게 내뱉었다. 아마 그는 대사가 끊긴 순간 자연스럽게 다음 대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2 시간 같은 2분을 기다려도 그 누구도 말이 없자 아오 답답해라 그냥 내가 한다, 싶어서 그냥 자신이 내뱉을 대사를 탐색했을 것이다. 이때 '탐색'이 가능한 건 대본의 흐름뿐만 아니라 어느 타이밍에 대사가 나오는지 완벽에 가깝게 파악한 결과다.


... 왜 나는 그처럼 대본의 모든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을까. 다른 배우들의 상태만 신경 쓴 탓인가? 그렇지만 다른 배우가 대사를 헷갈린 걸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내가 흐름을 파악했다면 내가 그 상황을 해결했을 텐데, 하지만 다른 배우가... 커튼콜 때 모두가 일렬로 서서 손을 잡고 인사하고, 무대 중앙을 통해 쭉 나가는데, 관객 사이를 쭉 지나서 교수님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까지도 이 사태에 대해 나에게 어떠한 책임이 있는지 마음이 갈팡질팡 했고, 그 때문인지 교수님의 눈을 피했다. 뭔가 한소리 들을 것 같았다. 그러고 시 한소리 들었다.


"배우장, 머리 박으세요."

"...?!"

"대사가 끊기면 배우장이 책임지고 이어나가야죠!"


"... 아니 저도 이어나가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왜 제 책임인지...?"


라고 말씀드리진 않았다. 그냥 '죄송합니다'라는 마음을 얼굴에 드러냈다. 사과는 드리지 않았다. 머리도 박지 않았다(애초에 그런 걸 진심으로 시키는 분이었다면 연기 수업을 듣는 동안 믿고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득 배우 중에서 누가 배우장을 정하는 한 달 전 수업날이 떠올랐다. 배우장이 무슨 역할을 하는 거냐고 내가 여쭤봤었고 교수님은 배우 전체를 총괄하는 역할이라 하셨다. 그때의 의문은, '도대체 뭘 총괄해야 하는 거지?'였다. 나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고 극단에서 활동해 본 적도 없어서, 학생들에게 연기 테크닉적인 도움을 줄 수도 없고 그 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나는 내 역할을 스스로 생각해야 했고, 나름대로의 결론은 '대사라도 정해진 시간 안에 외워오게 하자'였다. 같은 배우로서 다른 배우에게 연기에 대해 조언을 주는 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실제로 내가 연기력을 지적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배우장의 역할을 스스로 정의한 채, 약 한 달의 짧은 기간이지만 나름 그 역할을 수행하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내가 책임졌던 그 '대사'가 첫 연극에서 발목을 잡았고, 나는 힘없이 고꾸라졌다. 교수님이 머리를 박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아도 이미 정신적으로 머리를 박고 있는 상태였다.


11번 배우님 덕에 인생 첫 연극의 죽을 고비를 넘긴 배우들은 연극이 끝나자마자 어디서부터 대사가 꼬인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대본집을 받아서 모였다. 이거 어떻게 된 거냐, 몇 페이지에서 누가 대사를 안 한 거냐, 하면서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역시나 자신의 대사를 몇 번 빼먹은 배우가 있었다. 그 사실을 6번 배심원을 맡은 분의 브리핑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여기서 *번님이 대사를 안 하셔서 꼬인 것 같고, 그러고 1번 님이 9대 3, 유죄 우세입니다 하신 다음에..

배우장님이 못 받으셨고..."


그렇다. 정적 사태가 일어나기 전 마지막 대사 후 다음 대사는 내 대사였던 거다. 이전 배우가 대사를 안 해서 건너뛰었든 뭐든 결국 내 대사를 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이상하게도 교수님은 연극이 끝나고 나서, '대사 왜 안 한 거죠?'가 아니라 '배우장이 책임지고 대사를 이어나가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 말은 즉 무대 위 배우 모두에게 연극을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으나, 문제가 생겼을 때는 배우장이 해결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난 그제야 교수님이 배우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완전히 달랐음을 깨달았고, 교수님이 바라는 배우장의 역할을 지금의 내가 수행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부족한 탓이 아니라 대학생이 짧은 기간 연기를 접하고 바로 연극을 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벌어진 상황일 뿐. 내가 아니라 다른 배우가 대사를 틀리더라도 그 책임은 내게 돌아올 것인데, 나는 그것이 연극을 처음 올리는 배우장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교수님의 질책을 들은데다 내 대사를 놓쳤음을 안 상황임에도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진 것과는 별개로, 30분 뒤인 8시에 2회차 공연이 남아 있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