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짜리 원테이크를 책임지는 것에 관하여
"공연이 당장 오늘인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처음으로 실제 무대에서 리허설을 했던 공연 2시간 전. 우리는 아직도 대사를 외우지 못했다. 1시간이면 끝날 리허설이 1시간 30분이 걸렸다. 예정보다 길어진 30분은 배우들의 대사가 끊겨서 침묵하는 시간이었고, 그 침묵의 시간 동안 교수님은 우리를 조용히 응시하고 계셨다. 예전 연습과는 달리 대사를 잘못 말하거나 대사를 잊어도 교수님은 절대 도와주지 않았다. 즉 대사를 외우지 못해 생긴 불편한 침묵을 너희들이 책임지고 받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애드리브로 상황을 모면하든 대사를 떠올리든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사실 무대에서의 실수를 배우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연극에 '다시'는 없다. 말이 꼬여서, 대사를 잊어서, 갑자기 물건을 넘어뜨려서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는 용납되지 않는다. 영상을 만든다면 촬영 도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컷을 할 수 있겠지만, 연극은 컷이 없다. 연극에서는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일상을 사는 자신이 아니라 연극에서의 역할을 철저히 유지해야만 한다. 또한 역할을 유지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대사를 완벽하게 외웠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다. 대사를 외우지 못하면 다음 대사를 생각하느라 전전긍긍하게 되고, 대사량에 치여서 무대에서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우리는 부자연스러워질 움직임도 없었다. 움직임이 있으려면 최소한 대사가 끊기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져야 하는데, 한 사람이 열연을 해서 상대 배우에게 감정을 전달하면 대사가 끊기고, 그 배우는 어떻게든 대사를 기억해 내려고 허공을 보고 있고... 허공을 보며 대사를 꾸역꾸역 떠올리는 시간은 정말이지 지옥과 같다. 대사를 외우지 않은 사람은 내가 아닌데, 흐름이 끊긴 무대를 보는 교수님의 눈빛이 느껴지면 잘못하지 않은 내가 벌을 서는 기분이다. 벌을 대체 몇 번이나 섰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10번은 넘게 섰을 것이다. 무대를 환하게 비추는 조명은 우리를 빛나게 하는 게 아니라 대사를 외우지 못한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1시간 30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무대 중앙을 통해 퇴장한다. 그러고는 퇴장곡이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분명히 그 연습이 끝나고 나서 내 얼굴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을 것이다. 퇴장하고 나서 커튼콜을 위해 배우 전용 통로로 무대로 복귀할 것이고, 복귀했을 때 그 무대 위에서 교수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으며, 2시간 뒤에 이 공연을 무사히 올릴 자신도 없었다. 통로로 나가서 공연장을 벗어나서 배우들은 "저희 어떡하죠" "교수님 화나셨을 것 같은데..." 이야기를 하면서...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이겨내고 배우 전용 통로를 통해 무대로 올라갔다. 통로를 통해 무대로 올라가기 직전쯤 퇴장곡이 끝났고, 무대에 올라가는 배우들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다들 자신들이 벌인 참극에 눈치를 보느라 아무 말도 없었다. 발자국 소리가 멈추고, 어둠 속이지만 억지웃음을 하고 배우들을 눈동자로만 살펴보는 교수님과, 조명 속이지만 죽상인 표정으로 교수님의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는 배우들 간의 대치 상태가 10초간 이어지며 서로 침묵한다. 무대 리허설 때 발생했던 침묵을 질책받는듯한 침묵이었다.
"공연이 당장 내일인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
"지금 대사 숙지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늦은 것 같고요. 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더 잘 느끼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7번, 11번. 이 두 사람 빼고는 무대 위에서 그 '역할'로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에 몰입해야 해요. 우선 공연이 6시니까.. 5시까지 빨리 식사하실 분들은 하고 오시죠."
나는 7번이었고 리허설 때 내 역할에 충실했음을 확인받고는 기뻐했으나, 다른 배우들이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면 부자연스러운 연극이 되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밥을 먹으러 갔다. 학식을 먹을 수 있었지만 정돈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편의점 음식만 먹을 자격이 있다고 느껴졌다. 배우 5명 정도가 편의점 테이블에 모여서 줄김밥을 먹었고 각자 어디서 대사가 끊겼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끊긴 부분이 어디였는지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어질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밥 먹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하고 남은 시간동안 각자 대사를 외우는 편이 나아 보였다. 하지만 대사를 외워 오라고 수없이 말해 왔기에, 또 대사를 외우지 않으면 실전에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심각성을 온 몸으로 느꼈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대사 좀 외워 주세요' 하고 요청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벗어나서 공연장으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대사를 외우라고 이야기하기보단 무대에서 하루라도 빨리, 한 번이라도 더 연습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교수님께서 보고 계셨다면 더 좋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배우들이 심각성을 빠르게 인지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연습에 빠지는 인원이 계속 있었어서 무대 연습이 무의미한 순간이 꽤 많았다. 교수님께서 참여하는 날에도 배우가 부족해서 불만을 토로하셨던 경우가 있었으니. 이젠 공연을 앞둔 상황에서 물러설 방법이 없다. 실전에서 대사가 꼬이더라도 헤쳐나가야 하겠지만, 다른 배우가 잘못했을 때 관객을 불편하게 하리라는 점이 가장 걱정이었다.
그런데 실전에서 내가 대사를 하지 못해서 관객을 불편하게 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