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4일 전, 첫 동선 연습을 시작하다

언제까지나 대본을 보며 연습할 수는 없다

by 사육일칠

연극 공연을 올리기 4일 전. 한 배우가 동선 연습 중에 자꾸 휴대폰을 본다. 그날은 아마 처음으로 동선 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4일 전임에도 첫 동선 연습이라 이야기하는 이유는 '대본집을 보지 않는' 첫 연습이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계속 도서관에서 대사 연습만 하느라 마땅한 곳에서 동선을 연습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큰맘 먹고 연습실을 통으로 빌렸다. 3시간에 무려 2만 원짜리를! 댄스 스튜디오라 가격이 저렴했지, 만약 소극장이었다면 몇 십만원까지 뛰었을 것이다. 공연 소품도 못 사는 가난한 대학생들을 파산에 이르게 하는 금액이다.


연습실은 지하에 있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꿉꿉해지다가, 연습실 문을 여니 꿉꿉함이 극에 달했다. 덕분에 조명을 켜자마자 공기청정기부터 눈에 보였고 바로 콘센트를 꽂아서 공기를 정화시켰다. 그제야 휘황찬란한 조명이 보였다. 보라색에 빨간색에 초록색까지 섞여서 시각을 뒤흔들었다. 이 자극적인 조명 속에서도 연기를 해 내는 것이 배우의 몫.


처음엔 모든 배우가 대본을 보면서 동선 연습을 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제대로 된 연습이 안 된다는 생각에, 1막 연습이 끝나고 나서 모든 배우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이번에도 대본 안 보고 연습해 봅시다."


갑자기 배우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시험을 앞둔 학생들처럼, 대본집을 연습실 구석에 놓으러 가는 동안 악착같이 대본집을 보며 쉽사리 바닥에 놓질 못했다. 여태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듯 앉아서 외웠던 대사를 서 있는 채로 움직이며 내뱉기 시작하자, 대사를 잘 외웠다고 자신만만했던 배우들도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지고 딕션이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불편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 이상 대본집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대사를 못 외우고 동선을 이상하게 잡아서 진행이 안 되는 상황이 정말 끔찍하고 불편한 상황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껴야만 경각심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심 '이렇게 하면 어떻게든 대사를 외워 오겠지' 하고 안심했었다.


그러나 안심된 마음을 박살 내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한 배우가 휴대폰을 꺼내든 것이다. 대본집을 볼 수 없으니, 파일로 저장된 대본집을 휴대폰을 통해 보는 것이다. 배우들의 호흡을 신중히 지켜보고, 상대 배우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자신의 다음 대사를 해야 하는, 사람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 게 연극이다. 그런데 폰을 보고 있으면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다. 당연히 대본을 못 본다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폰을 꺼내 들었겠지만, 그래서 그 폰으로 대본을 보고 있다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다들 맨몸으로 연기를 이어나가는 상황에서 휴대폰을 보는 행위가 좋게 보일 리 있겠는가. 심지어 폰을 보는 배우에게 "00 님 혹시 대본 보시는 거예요?"라고 직접 물어보는 배우도 있었다. '지금 혼자 폰을 보고 있으면 안 되지 않나?'라는 마음을 돌려 돌려 순화한 표현 같았다.


예전에 휴대폰을 한 손에 들고 발표를 하던 학생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맨몸으로 발표를 하는 게 아니라, 준비해 온 대본을 휴대폰 화면에 띄워놓고 읽듯이 진행했던 것이다. 물론 안 될 건 없다. 안 될 건 없는데... 그 발표를 들었을 때 엄청난 거부감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폰이 아니라 큐카드였으면 괜찮았을 것 같다. 사실 폰이든 큐카드든 그 발표를 할 때 발표자가 진행을 원활히 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는 점에선 용도가 같다. 다만 휴대폰을 쳐다본다는 행위 자체가 너무 '일상적'이다 보니, 발표와 같이 전문적으로 보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질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발표는 그나마 일방향 소통이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호흡을 맞출 필요는 없다지만, 연극은 쌍방으로 소통해야 하는데, 과연 폰을 보면서 대사를 뱉는 배우와 몰입력 있는 연기를 이어나갈 수 있겠는가. 애초에 '폰만 보면서 대화하는 상대에게 짜증을 내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그 배우에게 몇 번 주의를 줬다. 폰 안 보고 대사 해주셔야 할 것 같다. 상대 배우의 얼굴을 보고 호흡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한 5분... 간은 폰을 보지 않다가, 자신이 대사 할 차례가 가까워지면 다시 폰을 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그 배우는 일주일 전에 대본 검사를 할 때 대사를 거의 완벽하게 외운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실전과 비슷하게 동선 연습에 돌입하니 불안한 마음이 커져서, 폰으로라도 대본을 봐야겠다는 유혹을 못 이긴 것이다.


겨우겨우 1막을 대본집 없이 연습을 진행하니, 이미 대관 시간인 3시간이 지나 오후 9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다들 표정이 심각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우리 연극을 올릴 수나 있을까? 싶은 표정들. 나는 이때다 싶어 제안했다.


"딱 한 시간만 더 연습하시죠. 이대론 안 될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듣곤 배우들은 아무 말 없이 대본집을 가져오고는 연습실 땅바닥에 둥글게 앉아 자신의 대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웃음기라곤 없었다. 대사를 하다가 틀리면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는 배우도 있었다. 아마 그때쯤(그제야) 배우 모두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직감했던 것 같다. 연습을 끝마치고 나오니 10시쯤. 해는 진작에 져서 어둑어둑한 상황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각자 집으로 향하는데 그 인사가 전혀 해맑지가 않고, 다음날 출근할 때 어차피 보니까 간단하게 인사하는 직장인의 바이브였다. 한창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 찝찝한 상태로 퇴근하는 직장인.


드디어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는 상태에 도달했구나. 다행이다... 생각하며 내일 있을 동선 연습을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장소는 같은 곳에서 진행하지만 큰 변화가 있다. 교수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셔서 연습 상태를 점검하시기로 하셨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