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1박 2일
백수과로사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유럽 여행을 다녀와 보름 남짓 지났다. 그동안 이틀은 고향엘 다녀오고 하루는 장인어른 성묘를 다녀왔다. 골프 라운딩을 4번 했고 등산을 2번 했다. 등산 이라기엔 트레킹에 가까웠지만 가족들과 청계산 매봉에 다녀왔고, 혼자서 방배동에서 우면산을 넘어 양재 꽃시장까지 걸어 가 화분 하나를 사다 분갈이를 했다. 그리고 필라테스, 기타, 골프 레슨을 받았다. 5번의 저녁 모임이 있었다.
그사이 가장 큰 일은 <브런치스토리>에 계정을 만들고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일이다. 짬날 때마다 브런치에 여행기를 올리다 매일 아침 9시에 글을 올려야겠다는 규칙을 세웠다. 밤에 적은 것들을 아침에 보면 낯간지러울 때가 많아서 발행시점을 아침 9시 전후로 했다. 지금까지 19편의 여행기와 두 편의 백수일기를 올렸다. 간혹 지인들이 아이디가 왜 <나인컴>인지 묻는다. 특별한 의미 없는 '삼돌이' 같은 이름이다.
아내의 출근과 둘째의 등교 이후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식탁-낮엔 나의 집무실-에 앉아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열고 메시지들을 읽고 하루 일정을 적는다.
23년 5월 22일 (월)
8시 30분 브런치 글 올리기
9시 30분 피트니스-걷고/뛰기 인터벌 운동 1시간
10시 골프 연습 30분
12시 점심 약속 (충무로)
3시 장례식장 조문 (건대병원)
6시 저녁약속(이태원)
충무로에서 예전 동료와 칼국수를 먹었다. 대한극장 맞은편 진양상가 옆에 허름했던 칼국수집이 식사 때면 문정성시였는데 충무로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가 넓어지고 한결 깨끗해졌다. 여기 다대기와 금방 담근 김치를 좋아했는데 다대기에 너무 욕심부렸나 보다. 조금 짜져서 특유의 멸치 육수 맛이 덜 느껴진다. 식사를 마치고 인현시장을 가로질러 후미진 골목길을 걸으며 다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는데 거짓말처럼 다방이 눈에 띄었다. 다방에는 쌍화차가 어울릴 것 같아 달걀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주문했다. 장난처럼 선택했지만 2 칼로리 커피와 다른 진함과 가득함이 있다.
지인과 헤어지고 쌍림빌딩 지하의 와인샵에서 이탈리아 끼얀티 와인 한 병과 가성비 좋은 호주 와인 2병을 샀다. 술이 살짝 올랐을 때 내놓을 요량으로 고른 호주 와인은 머지에서 생산된 스페인 품종이었는데 비비노 평점이 4.0에 이런저런 할인을 해 18,000원에 저렴하게 구입했다. 마셔보니 Value for money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다.
장례식장에 들러 조문을 마치고 저녁 약속 장소인 이태원으로 가는데 시간이 좀 이르다. 일부러 강변북로로 방향을 잡고 정체 구간을 라디오를 들으며 천천히 갔다.
오늘의 호스트는 A대표님이다. A대표님은 어떤 주의나 주장에 얽매이지 않고 규정하지 않았고, 오늘의 선택을 내일 웃으며 바꿀 수 있으며, 언제나 유쾌하고 화가 나면 바로 화를 낼 수 있는 투명한 혹은 용기 있는 또는 맑은 분이다. 또 다른 호스트이자 게스트 B대표님은 21년 초 장안의 화재였던 드라마를 만든 주역이고 지금은 그 후속 편을 만들고 계신데 나이가 무색하게 한귀여움 하신다. 그리고, 한류 콘텐츠를 해외에 팔아 국위선약에 앞장서고 있는 상암동상인 C님 이렇게 4명이 이른 저녁에 A대표님 사무실에 모였다. 사실 누가 호스트고 게스트 구분이 없다. 약속을 제안한 사람이 호스트라면 C님이 호스트이다. 모두가 호스트고 모두가 서로의 게스트였다.
처음엔 사무실 옥상에서 음식을 시켜 서울의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시는 계획이었는데 미세먼지가 심해 이태원 골목의 한식요리주점에서 1차를 했다. 2차를 계획하고 1차라고 한 건 아니고 출발할 때의 기세나 분위기로 봐서 일찍 헤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모둠회와 보쌈과 미나리전에 상암동상인 C님이 가져온 와인 두 병과 내가 선택한 가성비 와인 한 병을 비웠다. 취기가 오르고 흥도 올랐다. 그 어수선한 와중에 B대표님이 재빠르게 계산을 하셨다.
밖에 나오니 그사이 잠깐 비가 왔는지 길이 조금 젖어 있고 하늘이 한결 깨끗해졌다. 가로등과 상점들의 조명으로 이태원 골목이 운치 있다.
A대표님 사무실의 옥상으로 갔다. 이미 옥상 한쪽에 일단의 무리가 맥주를 마시고 있다.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우리가 옥상에 들어서자 갑자기 부산해진다. 스피커를 가져와 B대표님의 휴대폰과 블루투스로 연결해 주고, 테이블 위에 에탄올 불멍 난로를 올려놓는다. 테이블 주위 바닥에 전선으로 연결된 조명등으로 한 바퀴 에워싸는데, 하트모양으로 해달라고 했다가 ABC님에게 핀잔을 들었다. 와인과 스낵을 올려놓으니 순식간에 옥상이 루프탑 근사한 카페로 변신했다.
밤 하늘이 깨끗하고 바람은 서늘하다. 가까이 이태원의 붉은빛 조명과 하얀 도시의 불빛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남산서울타워도 선명하다. 용산공원의 검푸른 숲 위에 낮게 닿을 듯 뜬 초승달이 니스의 해변을 연상시킨다. 그 얘기를 했다 유럽 다녀온 티낸다고 또 핀잔을 들었다.
그 야경과 함께 웃고 떠들고,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흥이 오르면 어깨춤을 추기도 하고, 따라 부르기도 했다.
11시쯤인가 흥이 조금 잦어들 무렵 또 일단의 무리가 맥주를 한 봉지 사들고 나타났다. 서로 알기도 모르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어울려 음악과 술과 유쾌한 대화를 했다. 너무 힘차게 건배하는 바람에 와인잔 하나가 깨졌지만 좋은 와인잔은 그런 거라며 다들 유쾌해했다. C님은 비싼 바지에 와인을 쏟아 아쉬워했다.
자정이 조금 넘어 자리를 파하고 집에 오니 1시다. 이른 아침 골프가 있어 새벽에 나가야 한다. 가방을 싼 후 알람을 4시 30분에 맞춰놓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분당 아래 강남 300CC에 도착하니 5시 30분. 6시 8분 티오프라 전날 동행자들에게 '아침 생략, 9홀 마치고 그늘집에서 식사, 라운딩 후 각자 일터로'라는 규칙을 알려주고 모두의 동의를 받았었다. 아침을 먹지 말자고 제안한 건 나였지만 술도 깰 겸 골프장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와 삼각김밥을 먹었다. 작년에 일본에서 편의점 삼각김밥 맛에 눈을 뜬 후 서울에선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맛이 괜찮다.
골프를 마치고 씻고 나왔는데 아직 정오도 안됐다. 근처의 보리밥집에서 보리밥에 나물을 넣고 청국장과 함께 비며 먹었다. 열무김치가 맛있다. 오늘 저녁은 열무김치를 담그야겠다 생각을 했다.
오후에 잠깐 낮잠을 잤다. 알람소리에 깨긴 했는데 몸이 점점 가라앉고 좀 더 자고 싶은 유혹이 있었지만 할 일이 많다. 기타 수업도 가야 하고, 물김치도 담가야 하고, 여행기도 마저 정리해야 한다.
저녁은 아들이 배달음식으로 간단히 먹자고 했는데 기타 수업 마치고 마트에서 금방 손질해 둔 은대구 서더리탕거리를 사서 돌아왔다. 아내 퇴근 전까지 1시간 정도 남았으니 충분히 우려낼 시간이 된다. 무와 생선뼈를 함께 끓이다 양념을 하고 약불로 30분 정도 지나니 진하고 시원한 대구탕이 완성됐다.
저녁을 먹고 열무김치 담그기를 시작했다. 열무와 얼갈이 배추를 다듬고 씻고 절이고, 새우젓과 고추씨를 한소끔 끓여 김치 국물을 만들어 두고, 찹쌀과 밀가루를 섞어 풀을 끓이고, 배와 양파와 마늘을 갈고, 붉은 고추와 청양고추를 썰어 김치 국물에 넣고 소금과 젓갈로 간을 맞춰 양념을 마무리했다.
김치 담그는 일은 매번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여서 사서 고생을 한다 생각하면서도 때가 되면 한번씩 하고 싶어 진다. 김치 담그는 프로세스와 진전이 좋다. 다양한 공정을 지나 김치를 김치통에 넣을 때의 뿌듯함과 한번 만들어두면 한동안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충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김치를 마무리하고 이틀의 여정을 대충 기록하고 나니 자정이다. 길었던 1박 2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