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소소한 일상
알람은 6시에 맞춰져 있다. 이제 처음 울리는 알람소리 정도는 잠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끄고는 다시 잠이 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8시 30분. 예전에 늦잠을 한참 잤다 싶어도 눈을 떠보면 7시 정도인데 이제는 8시까지 자는 건 일도 아니다. 요 며칠 숙면을 못했었는데 늦게까지 깊이 잤다. 그래도 몸은 찌뿌듯한 게 아마 긴장이 없어져서 그런가라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희준이를 깨워 같이 아침을 먹었다. 잠이 덜 깬 희준이는 식탁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차려진 밥상을 바라보더니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먼저 일어선다. “하나도 안 먹었잖아”했더니 “눈으로 먹었어요”라고 대답한다. 피식 웃을 수밖에.
지난주 목요일 한 PT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이 욱신거려 게으름을 피고 싶었지만 요 며칠 많이 먹기도 마시기도 해서 조금 가벼워질 요량으로 산행을 하기로 했다. 가겠다고는 했지만 귀찮음이 몰려오던 차에 OCN에서 하는 영화 <Green Book>을 보고 나니 11시가 넘었다.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 속에서 성공한 피아니스트 셜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대 아래에서 차별을 받는다. 한 예로 자기가 공연할 식당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사를 할 수 없는데 지배인은 전통이라는 이유로 너무도 태연하고 당연하게 그리고 점잖게 얘길 한다. 그의 운전기사인 백인 토니와의 가장 보수적인 남부지방 순회공연을 위한 8주간의 여행 속에서 중년 남자의 우정이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오늘의 코스는 우면산을 가로질러 양재를 거쳐 청계산 옥녀봉까지의 왕복 4~5시간이다.
우면산에는 아직 지난 주에 내린 눈이 곳곳에 있다.
등산로는 사람들이 다니며 미끄러워져 있는 상태라 조심조심 걸었다. 가방에 아이젠이 없다. 스틱 하나에 의지해 눈길을 걸었더니 오른 손목이 조금 시큰거린다.
아이젠이 없이 청계산으로 가는 건 무리다 싶어 양재 꽃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양란 분갈이는 좀 따듯해지면 하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올 한 해 일본을 드나들며 무관심 속에 빈약해진 화분 몇 개를 빨리 바꾸고 싶었다. 동양란 2개의 모종과 서양란 1개와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샀다.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계획했던 산행을 반으로 줄였기 때문에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은 급하고 설레인다.
먼저 서양란을 집에 있던 화분에 심고(심는다는 표현보다는 꽂고), 동양란 모종 2개를 3개의 화분에 나눠서 분갈이를 하고 손질을 하고 나니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났다.
몇몇 마르고 병든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불편했었는데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를 하고 난 것처럼 홀가분하다.
백수의 하루는 부산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