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순간, 단순한 직면
심천을 거쳐 대만 출장길 아침, 좀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했다.
APEC카드보다 더 강력하다는 관세청이 발급하는 AEO카드 덕분에 수속이 일사천리다.
공항 라운지로 향했다.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구운 식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아침 식사를 하며 KLPGA 대회를 시청했다.
1위를 달리는 있던 선수가 아깝게 파온에 실패하고 어프로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상급 프로의 어프로치는 어떻게 다른지 식사를 멈추고 정지한 듯 지켜봤다. 백스윙이 커 보였지만 스핀이 걸린 공은 멀리 달아나지 않고 홀컵 가까이에 붙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파로 마무리 할 줄 알았는데 짧은 펏을 놓치고 보기를 기록하며 2위로 한 계단 내려앉았다.
그래 저게 골프다.
나는 구력 25년의 아마추어 골퍼다.
25년의 구력에도 여전히 실수가 실수를 부르는 전형적인 아마추어 주말 골퍼다. 거리와 방향성이 들쭉날쭉이지만 코스에서 어떻게 그린과 핀을 향해 갈지 생각이란 걸 하게 되면서 골프가 더욱 재미있어진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재미보다는 화를 참는 인내의 시간을, 기쁨보다는 좌절을 더 많이 맛봤지만 골프가 주는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몇 년 전 최경주 프로가 신문에 쓴 칼럼에서 골프 라운딩 중 막닦드리는 의외의 순간에도 <단순한 직면>을 해야 하는 게 골프의 매력이라는 글을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있다.
내가 골프를 매력적이라 느끼는 이유도 그 의외의 순간을 부정하지 않고 오로지 다음 샷만을 생각해야 하는 야속함 때문 일 수도 있다. 삶과 비슷하지 않은가.
짧게는 100m에서 길게는 500m 이상의 먼 곳에서 페어웨이를 지나 작은 홀 컵에 공을 넣는 건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어떤 쉬워 보이는 상황에서도 변수는 존재하며, 티샷이 쪼루가 나 쉽지 않겠다 생각하며 고개를 떨궜을 때 의외의 좋은 스코어를 기록하기도 한다.
이건 단순한 확률적 의외성이 아니라 온전히 내 몸과 마음 상태, 동료와 그때의 분위기, 바람과 온도 등의 날씨, 페어웨이의 언듈레이션과 러프의 잔디며 그린의 빠르기 등 골프 코스 등 수 없이 많은 상수와 변수들의 조합을 창출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골프가 안 되는 핑곗거리가 101가지가 있다고 할까.
1.5m가량의 채를 휘둘러 날려 보낸 지름 5cm의 공이 어디에 놓일지 모른다.
화려하게 날린 드라이버 샷이 벙커 턱에 있을 수도 있고 발끝 내리막 러프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린의 핀을 향해 쏜 멋진 세컨드샷이 그린의 엣지를 맞고 벙커로 내려갔을 때도 ‘아, 바람이…’라며 안타까워해보지만 아쉬워할 새가 없다. 다음 벙커샷을 준비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받아 들어야 하며 담담하게 그 상황을 직면하고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없던 일로 하고 싶은 유혹을 가끔 느끼지만 한번 실행하면 그 결과는 온전히 플레이어의 몫이다. 특히, 규칙이 있는 스포츠이지만 심판이 따로 없이 스스로 그 규칙을 지켜야 하는 골프는 스스로 유혹을 이겨낼 힘이 필요하다. 어떤 아쉬운 순간에도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아쉬운 순간은 수없이 많다. 결과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
아까 TV 중계에서 본 것처럼 ’눈 감고도 넣겠다, 한 손으로 쳐도 넣겠다‘ 싶은 상황에서도 실수는 할 수 있고 그 실수는 무를 수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친 한 타는 드라이버로 날아온 200m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이 언페어함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해 봤다.
그러나, 골프라는 운동의 절대규칙은 공을 홀컵에 넣어야 그 홀이 끝나는 운동이다. 그래서 끝나야 끝난 것이다. 골프는 장갑 벗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도 이런 이유이리라.
언제부턴가 나는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멀리건‘을 사양한다. 그리고, 샷을 실수한 후 표 나게 아쉬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물론 기뻐할 때는 화끈하게 기뻐한다.
골프는 의외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물리거나 안타까워만 하고 있을 수 없이 다음을 준비하는, 끝나기 전까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 그리고 결과를 인정해야 하는 운동이다.
이것이 골프에서 느끼는 매력이고, 내 삶에 투영하고 싶은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