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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구 Jul 11. 2024

백수생활을 마치며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내일은 새로운 회사에 출근을 한다. 주위 사람들이 내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22년 10월 말, 회사로부터 퇴임 통보를 받았다. 회사 그만두면 큰일 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철없음일까 낙천적 이어서일까, 안타깝고 화나기보다 홀가분했다. 가끔 어떤 순간순간들이 안타까운 회환으로 다가왔지만 그저 받아들이고자 했다. 마치 티샷 드라이버로 잘 맞은 공이 벙커나 라이가 좋지 않은 곳에 있더라도 그것 역시 골프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듯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백수생활은 생각보다 분주했다.

만나자는 요청에 안 가면 ‘시간이 많을 텐데 나와는 만나기 꺼려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부르면 무조건 가야 한다고 해서 오는 약속 마다하지 않고 잡다 보니 매일 저녁 일정이 촘촘했다. 아내는 누굴 그렇게 만나냐고 의아해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저녁 약속이 줄어들지 않자 나의 인간관계에 대해 감탄하기도 했다. 나이 먹으면 주위의 사람들이 정수리 머리 빠지듯 줄어든다고 하는데 일부러 관계를 정리할 필요를 못 느꼈다. 양주와 맥주를 파는 집 근처의 작은 바가 있는데 그 집에서 파는 생맥주 이름이 ”퇴근길“이다. 가끔 후배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앉아 “뭐 하세요? 퇴근길 한 잔 하러 오세요”라고 문자를 보내면 반가움에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달려가곤 했다.


PT와 필라테스, 재활치료 등 단단한 몸을 유지하는데 시간을 많이 썼다.

골프는 말 그대로 원 없이 쳤다. 일 년간 백 번이 넘는 라운딩을 했다. 라운딩이 반복하며 실패로부터 배워야 하는데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샷을 하기 전에 ’쫄지마! 잘못되어 봐야 보기 아니면 더블이야‘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여전히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골프는 실수를 줄이는 운동인데 나는 매 샷을 잘하려고만 했었던 것 같다. 경기가 풀리지 않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좀 돌아가거나 끊어가야 되는데 어쩌다 나오는 멋있는 샷을 매번 구현하려고 의욕을 앞 세운게 나의 문제점이었다. 뭐든 하고 싶은 건 맘껏 해보라고 하는 게 맞다. 이제 골프는 쳐도 그만 안쳐도 그만인 상태가 되었다. 이것도 소득이다.


퇴임 후 대부분의 로망처럼 나도 혼자서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했다. 군 입대 전의 큰 아들과 일주일 파리여행을 같이 했고, 재수를 앞둔 둘째 아들과 오사카의 미식투어를 했다. 아내와는 쿠알라룸푸르 골프여행, 친구들과 캄보디아, 후배들과 가고시마의 골프여행을 했다. 유럽여행을 하며 저녁에 일기처럼 하루를 기록했고 피렌체 민박집의 사장님의 권유로 브런치에 여행기를 올렸다. 여행기를 올리며 의욕이 앞서 직장생활을 하며 느낀 점들을 써 볼 욕심이 생겼다. 객관화할 수 있는 지식은 너무 일반적이고 주관적인 소회나 깨달음은 또 너무 낯간지럽기도 하고 자기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생각처럼 많이 써지지 않았다.


주식공부하는 데도 시간을 많이 썼다. 3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고 10년 이상을 경영관리직과 CFO직무를 수행했는데 정작 재테크와 관련된 금융지식은 문맹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유튜브를 들으며 공부를 했는데 허당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중에 나와 핏이 맞는 고수를 찾아 돈을 내고 일 년째 꾸준히 강의를 듣고 메모하고 투자에 반영하고 있다. 다행히 적정한 수익을 올리긴 했지만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의 주식시장의 변동성에 실망하기도 했다. 기업의 펀드멘털을 공부하고 시간에 기대어 투자하려고 했으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주식에도 다양한 격언이 있지만 인상적인 지침은 ‘공포에 매수하고, 탐욕에 매도하라’였다. 이제 회사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30% 정도는 미국의 성장주식으로 옮겨 뒀다.


통제하지 않고 구속받지 않는 시간들이었기에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나중에 아들의 기억 속에 회사를 그만둔 아빠가 푹 퍼져 있다는 인식을 가지지 않도록 아들이 학교 갈 때까지는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메모를 하며 짐짓 진지한 모습을 보이려고 연출했다. 내가 만든 규칙과 약속들로 여전히 바쁘게 지냈지만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들은 맘껏 했다. 이렇게 놀아도 되나 싶을 만큼 철없이 놀았다. 찾아주고 불러주는 지인들이 많았다. 고맙고 감사하다. 그렇지만 가끔씩 아침에 출근하는 아내와 학교 가는 아들을 배웅하며 ‘멋쩍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일 년이 지나고 또 해가 바뀌면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두 어디론가 출근하는 시간에 피트니스를 가는 길이 그리 경쾌하지 않았다. 자극과 스트레스 없는 평온한 일상을 즐기기엔 너무 젊었다. 그러나 쉰네 살, 새로운 잡(job)을 구하기에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이만큼 경험하고 연륜이 쌓였으면 이제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하는 건가 하는 자문을 여러 번 했다. 여러 번 고쳐 생각해도 내겐 ‘창업가 정신’이 충분하지 않았다. 지인들이 헤드헌트와 코칭 전문가 분들을 소개해줘서 많이 만나고 조언을 들었다. 그중 인상적인 조언을 직장을 찾지 말고 앞으로 할 일을 찾으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직장을 찾기로 했다. 다만 어딘가 소속이 되고 월급을 받기 위한 직장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쓰임이 되고 기여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래서 오너(Owner)가 있는 중소그룹을 피하고 미션이 명확한 회사에서 기회를 구하고자 했다.


잡(job)을 구하는 일은 ‘노력과 우연이 반응’하는 일이다.

이력서를 정리하고 인사팀 경험이 있는 지인들에게 부탁해서 리뷰하고 수정했다. 그러면서 경력을 관통하는 나의 메시지, 강점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지를 생각했다. 여러 곳의 헤드헌터들에게 이력서를 보내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설명했다. 취업 관련 SNS에도 자주 들락거렸다. 링크드인에 경력을 꼼꼼히 기록하고 가끔 포스팅을 했다. 링크드인에서 취업 관련 제안 대신 인터뷰 요청을 몇 번 받았고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성격일 때는 상담에 응해주고 용돈벌이도 했다. 리멤버에 있는 취업공고를 보고 지원했지만 대부분 미안하다는 회신이 왔다. 그 외에도 몇 번의 구체적인 제안을 받고 잠시 들뜨기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새로운 항구에 정박하다!

1월 초에 헤드헌트로부터 회사를 소개받고 나의 경험과 역량이 쓰임이 되고 기여할 수 있겠다 싶어 이력서를 정리해서 보냈다. 미션이 명확한 PE(Private Equity)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SI(Strategic Inverstor)와 두 곳의 PE가 주주로 있는 회사였다. 채용 과정은 생각보다 길었다. 4번의 인터뷰가 있었고, 세 번째 미팅에서는 회사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대해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4번째 미팅을 끝났을 때 엄청 쑥스러워하며 사주를 봐도 되겠냐는 질문을 해서 용한 곳이면 나중에 소개해달라고 하며 태어난 시를 알려줬었다.

처우협상과정에서 그동안 만났던 헤드헌트 몇 분께 조언을 구했다. 잡(Job)의 공백상태가 짧을수록 좋으니 처우 협상으로 Drop 하지 말고 아주 갭이 크지 않으면 받아들이는 게 좋다, 그래야 또 다른 기회도 생긴다는 조언이 와닿았고 가고자 한 회사의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의욕을 보이되 탐욕으로 보이지 않을’ 선을 유지하려고 했다. 처우협상 시점은 내가 명백이 ‘갑’의 위치에 있었지만 일을 시작하게 되면 그분들이 나의 ‘갑’이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처우와 관련된 미팅과 일부 조율을 위한 통화를 몇 번 하고 드디어 최종 결정이 되었다. 처음 이력서를 보내고 약 3개월이 지났다.


이제 다시 연결되고 무거운 책임감과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겠지만 기쁘게 그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소풍처럼!

평소 나를 아껴주시던 선배님이 보내주신 축하 화분에 “更上一層樓 “라는 글귀가 있었다. 검색을 해보니 당나라 시인 왕지환의 ‘관작루에 오르며’라는 시의 한 구절이었다. 백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여정을 위해 새로운 한 발을 내딛는 나에게 맞춤 글귀라 생각했다.

해는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황하는 바다로 흘러가네(백일의산진·白日依山盡, 황하입해류·黃河入海流).
내 눈으로 천 리 밖을 바라보고자 다시금 한 층 더 누각을 오르네(욕궁천리목·欲窮千里目, 갱상일층루·更上一層樓).


한 층 더 누각을 오르는 그 디딤은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삶의 여정이기도 하고 새로운 배움을 뜻하기도 한다. 이제 새로운 산업과 회사를 경험하며 과거의 지식과 선입견에 매몰되지 말고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으로 배움의 길로 가야겠다.




짧은 백수생활을 마치며, 그간 백수 생활을 함께 해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백수남편에게 어떤 잔소리도 없이 묵묵히 지켜봐 준 속 넓은 아내에게 고맙다.

1년 5개월, 마음속에 남는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감사함’이다.

더 사랑하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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