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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창기 Aug 09. 2024

‘26동 사건’과 박원순과 조희연, 그리고 김부겸

유신시대 그들의 인연

글쓴이: 박창기

기업인, 연구 교수, (주)팍스넷 창업자

2014년 5월 10일


6.4 지방선거에 출마한 박원순, 조희연, 김부겸을 응원하기 위한 글


교수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경찰들도 가만히 있으라며 곤봉을 휘둘렀다. 중앙정보부는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고문을 가했다. 부모님도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22세의 젊은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수였지만 목청껏 소리질렀다. 온 몸을 던져 소리쳤다. 이 나라가 침몰해 간다고! 결국 그 목소리가 퍼져나가 침몰해 가던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1977년 10월 7일의 서울대학교 26동의 작은 강당에서 그 목소리가 드디어 터져 나왔다. 긴급조치 9호의 엄혹한 언론탄압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관악산의 ‘26동 사건’은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이번 지방선거의 주요 출마자인 박원순(서울시장 후보), 조희연(서울시 교육감 후보, 성공회대 교수), 김부겸(대구시장 후보), 김석준(부산시 교육감 후보, 부산대 교수)은 같은 시기에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동지들이었다.


당시 27세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고, 김기춘 현재 대통령 비서실장은 당시 39세로 김재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유신체제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희연, 박원순, 김석준, 김부겸과 26동 사건

이 사건의 핵심 관계자들에는 75년도 입학생들로 당시 대학교 3학년 조희연 현 서울교육감 후보, 김석준 현 부산시 교육감 후보, 2학년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도 있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김영란 법 제안자로 유명한 김영란 전 대법관과,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조배숙(전 국회의원) 경기여고 법대 3인방도 모두 1975년 대학에 입학한 동기생들이었다.


26동 사건의 진행

10월 7일 관악캠퍼스 26동 대형 강의실에서는 사회학과 창설 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으로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의 사회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사회학과 3학년 학생 조희연, 김석준과 심상완(현 창원대 교수)이 주제 발표자였고, 피정선(국제화학에너지노련 아태지역 사무처장)과 박홍열(작고, 전 신용회복구조대 사업단장)이 행사 실무 책임자였다.


그런데 심포지엄이 열리기로 했던 오후 2시 직전 학교 측이 갑자기 행사를 취소했다. 발표 학생들을 교수들이 억류했다.


26동 강당을 메운 학생들은 심포지엄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발표자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진행자들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조희연과 김석준이 학과 사무실에 연금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당에서 기다리던 학생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발표자를 풀어주라!”, “심포지엄 속행하라!”,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기저기서 구호가 터져 나왔다.

발표자가 나타나지 않자 자연스럽게 공식적인 발제자 없이 학내 현안 토론회가 시작되었다. 엉겁결에 발언을 하게 된 철학과 3학년 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학도호국단 자율화 건의 수락, 학생징계 철회, 학보와 대학신문 검열 중지”를 학교 측에 요구한다는 발언을 했다. 몇 학생이 더 발언을 했고 자연스레 농성으로 들어갔다.


경찰과 기관원들에게 포위된 채로 문을 걸어 잠갔고 ‘총장은 물러가라’ ‘학원 자유 보장하라’ 같은 학내 구호가 점차 ‘긴급조치 해제’ ‘유신헌법 철폐’로 수위가 올라갔다. 


‘선구자’ ‘정의가’ ‘강변에서’ 같은 노래도 함께 불렀다. 토론 후 경제학과 부윤경(삼성미래전략실 부사장) 등이 결의문을 작성하고 박관석(목포대학교 교수)은 이를 낭독했다.


26동 사건의 영향

5시간의 농성 끝에 7시 30분경 26동 안에 있던 학생 400여명 전원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들은 며칠씩 갇힌 채로 조사를 받았고 이중 8명이 구속되었다. 홍윤기, 박홍열은 1년 6개월 징역, 심상완, 김용관(성균관대 교수), 박관석, 강천, 최상일, 전경재 등이 1년 징역형을 받았다.


사회과학대 학보사 편집장이었던 김용관(성균관대 교수)은 고등학교 동창 부윤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결의문을 작성했다고 진술하여 감옥행을 자원했다는 전설 같은 미담이 있다. 단순히 학술토론에 참관했던 많은 학생들도 구속되고 징계처분을 받았다.


유신과 긴급조치의 무서운 탄압 속에서도 민주화 열기가 뜨겁다는 것을 학생들은 이 날 확인했다. 박정희 정권이 너무나 많은 학생들을 무리하게 구속한 것에 대한 분노가 커갔다.


한달 후인 11월 11일 권형택, 김경택, 문성훈, 장기영, 양기운, 연성만의 6인이 주동하여 중앙도서관을 점거하여 1975년 이후 최대의 민주화 요구 집회를 성공시켰다. 국사학과 3학년의 연성만(기업인)은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3,000명의 군중을 향해 몇 시간 동안 선언문을 읽고 연설을 했다.


1시에 시작된 시위는 7시 40분 경찰이 철문을 부수고 진입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전원 연행되어 이 중 11명이 구속되었고, 제적 28명, 무기정학 34명, 유기정학 6명의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다.


김부겸(대구 시장 후보)도 이 자리에 참여했다. 대구 경북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성균관대 법대에 들어갔던 그는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76년에 서울대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2학년이었다. 차기 학생회장 재목으로 주목받던 김부겸을 선배들이 비밀통로로 탈출시켰으나 결국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1977년의 서울대 상황

1972년 유신체제가 시작되고 1974년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다. 1975년 처음 문을 연 관악산에서 꿈꾸던 대학생활을 시작한 그들에겐 생각지 못한 인생항로가 예정되어 있었다.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8인에 대한 사형 집행 이후 학교는 암흑 같은 공포가 짓눌렀다. 학생들끼리 모여서 강당에서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구속 수감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문명국가에서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유신체제는 그랬다. 


1975년 5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발령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비방하면 영장 없이 체포하여 1년이상 징역형” “위반내용 보도하면 언론사 정간 폐간”한다는 잔인한 내용이었고. 실제 이 때문에 800여명이나 구속되었다.


1975년 5월 22일 동아일보 탄압 반대시위에서 단순 가담자였던 1학년 학생 박원순도 구속되었다. 감옥 살고 나온 그는 3년 후 단국대 사학과에 진학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학생시위가 발생하지 않았다. 학교 안에는 경찰, 국정원, 보안사의 기관요원들 몇 백 명이 사복을 입고 감시했다. 긴급조치 9호가 효력을 발휘하여 유신체제가 안정화된 듯이 보였다. 어떤 반대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침묵을 돌파한 것이 26동 사건이었던 것이다. 도서관 점거 시위에서 자신감을 얻자 연대, 고대, 성균관대 등의 학생운동 세력은 민주화 시위들을 잇달아 성공시켜 유신체제를 흔들었다.


26동 사건과 나

26동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0월 5일 나는 다른 단과대학 편집장들과 함께 학생담당 총장보 법대 백충현 교수를 찾아가 “학도호국단장 간선제 폐지를 총장께 건의하는 문건과 서명학생 명단"을 전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예상대로 싸늘한 반응과 협박에 가까운 훈계만 듣고 물러났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의 분노가 26동에서 분출된 것이다.


자연과학대학 학보사인 ‘과학세대’의 편집장이었던 나는 법대의 김태현(민주노총 기획실장), 가정대 박애령(송곡고등학교 교사), 인문대 장석만(종교문화비평학회장), 사범대 김종철(서울대 교수), 사회대 김용관과 함께 주기적으로 회합을 해왔다.


학생회가 해체되고 학도호국단은 여용단체였던 터라 6개 대학 편집장 모임은 비공식적으로 학생들의 대의기구 역할을 했다.


다음날인 10월 6일 식물학과장인 정영호 교수가 불러서 가보니, 가정방문을 하겠다며 집으로 함께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운전기사가 딸린 자가용이 인천 수봉산 기슭의 허름한 집에 예고도 없이 들이 닥쳤다. 교수와 함께 나타난 나를 보고 부모님과 할머님은 크게 놀랐다.


정영호 교수는 우리 부모님들에게 박창기 학생이 다칠까 봐 당분간 자기가 보호하겠다고 이야기했고 부모님은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정영호 교수의 자택이었던 세운상가의 아파트에서 며칠 동안 감금되었다. 서울 교외에 있는 정교수의 별장에서 고립되어 친구들을 걱정하며 번민해야 했다.


열흘 만에 학교로 돌아온 나는 경악했다. 26동 사건을 그 때 알게 되었다. 김용관은 이미 구속되었고 김태현은 얼마 후 구속되었다.  김종철, 장석만은 정학 처분을 받고 강제로 징집되어 군대로 떠나갔다.


동료들이 사라진 대학에서 나는 중앙정보부 요원의 감시를 받고, 집에서는 인천경찰서 황형사의 감시를 받으며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이 때의 사연은 처음으로 공개 언론에 밝힌다.


1978년 연전 연승


다음해 학생운동 지휘는 4학년 된 75학번의 김수천(아시아나항공 사장)이 맡았고, 양민호(전 대한광업진흥공사 감사), 김준묵(한국문화진흥 창업자), 김태현(민주노총 정책실장), 이우재(전 인천운동연합 부의장), 성욱(농업인), 이필렬(방송통신대 교수) 서동만(작고,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 기조실장), 부윤경, 이승배, 류인렬(인디저널리스트학교 대표), 유종성(미국 샌디에고대 교수) 들이 민주화 시위를 성공적으로 조직해 나갔다.


이백만(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병호(서울시 농수산식품공사 사장), 유인택(서울뮤지컬 단장), 조성을(아주대 교수), 반병률(한국외대 교수), 이창호, 백삼철, 배남효, 이증현, 주재석, 박병태, 박인규(프레시안 대표), 김철수(㈜코뎀 전무), 김종복(캐나다 토론토 목사), 조홍섭(한겨레 기자) 변재용(한솔교육 대표) 임국진(창의와 탐구 대표)등 75학번들이 주도하여 학내 외에서 민주화 시위는 계속 확장되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개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민주화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다. 억울한 죽음도 많았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아직도 겪는 친구들이 많다. 인생의 항로를 잃어버린 젊은 인재들이 가슴 아픈 사연들이 지금도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주요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폭압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집요하고 조직적으로 가만히 있지 않고 유신체제에 타격을 가했다.


드디어 1978년 10월 독재의 심장부 광화문에서 5개 대학 연합 시위를 조직하는 단계까지 성장했다. 이 젊은 학생들의 함성은 국민들의 애국정신을 일깨웠고 이것이 유신정부의 중심부에 균열을 야기했다. 


1년 후인 1979년 10월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났고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


조희연과 박원순


주제발표자였던 조희연은 26동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기만 해야 했다. 학자의 길을 가던 조희연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불의에 저항하는 투사로 거듭났다.


그는 1년 후 10월 시위를 주도했고 구속되어 1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그로부터 34년 후인 2013년 3월,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7월, 서울고등법원은 조희연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조희연은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국가배상금을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기금'에 기부하기로 했다.


긴급조치 사건으로 구속되고 제적된 많은 학생들은 서울대 대학원이 입학을 거부하여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한 경우가 많았다. 조희연과 김용관도 그랬다. 이 후 조희연은 민주화 운동의 이론가로 역할을 다했고 후에 민주화교수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교육 민주화에 큰 역할을 했다.


1994년 조희연과 박원순이 주도하여 참여연대를 만들었다. 서경석과 유종성 등이 주도하여 89년 창립한 경실련과 함께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국민들에게 가장 신뢰를 받는 시민운동의 모범이 되었다.


또 다른 세월호를 걱정하며


 6월 4일 지방선거는 36년 전 대결했던 세력들이 다시 한번 격돌하는 모순적이며 중차대한 상황으로 전개 되었다.


 당시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자유의 향기가 충만하며 정의가 강물처럼 넘치는 나라였다. 관악산 골짜기의 작은 26동 강당에서 외쳤던 소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하늘은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였다.


대한민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36년 전의 젊은 목소리들이 다시 외친다. 침몰하는 대한민국을 외면하는 그들 대신 조타실을 맡겨 달라고. 대한민국을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나라로 다시 세우겠노라고.


투표소로 가서 정의로운 선장을 뽑는 자유를 행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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