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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상 Oct 06. 2020

토막글 001 [지금]

只今 (다만 지, 이제 금)

지금이라는 단어에는 나를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유명한 뮤지컬 넘버 ‘지금 이 순간’을 들을 때와 같이 마음이 괜히 웅장해지면서 없던 용기가 샘 솟는 기분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의 나는 ‘지금’이라는 단어를 ‘이겨내야 하는 순간의 달콤한 욕망’으로만 여겼다. 중세시대 사람이냐고 핀잔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나는 20대 중반까지 마치 목적지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았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어른들의 말은 아무래도 와 닿지 않았고, 주변에서 기대하는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발굽이 닳는지도 모르고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전에 마음이 텅 비고 말았다.


멈춰 서 버린 경주마(25세)는 퇴사와 심리상담, 입시 준비를 거치며 홀로 커다란 들판을 우왕좌왕 거닐었다. 그 들판에서 방황하는 경주마가 나 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알았다. 25세의 경주마는 여태 살아온 방식이 “열심히” 그리고 “계획적으로” 라서 우뚝 서 버린 지금 무엇을 해야 할 지 도통 알지 못했다. 새롭게 진로를 고민했지만 어느 경주장에서 뛰어야 조금이라도 빨리 결승선에 다다를지를 우선으로 생각했다. 결승선에 다다른 순간을 위해 기꺼이 ‘지금’을 헌납하고 있었다.


결국 들판에서 다그닥거리는게 지쳤고, 몸도 마음도 가만히 두고 싶어 해외로 나가는 편도 티켓을 샀다. 마음 한 켠에는 직업과 수입에 대한 걱정이 널뛰었지만 보따리에 쌓아 온 돈으로 자그마치 1년 동안 유랑했다. 그 즈음에는 YOLO라는 말이 아직 널리 쓰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영락없는 욜로청년 이었다. 그 기간동안 얻은 것들은 거창한 포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물 속에 집어넣지 않고 유영하는 법, 몇 가지 채소를 손질해서 콥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 법, 그리고 유럽언어의 굴리는 R발음을 내는 법. 이렇게 소소하지만 나름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를 습득했다. 약 2년 간의 방황과 1년이 넘는 유랑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경주마로 살던 나는 미래의 어떤 순간을 위해 매 순간 계획을 했었다. 다행히도 결국 미래에 원하는 것들을 얻었지만, 그 순간에는 또 다른 미래를 위해 계획을 하고 있었다. 우리집 고양이가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최선을 다해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최소한 귀엽기라도 하지. 계획 없는 유랑을 하며 나에 대해 새롭게 알 게 된 점은, 날 좀 더 믿고 지금을 충분히 즐겨도 된다는 것이다. 20년 넘게 야무지게 살아온 경력을 믿고 좀 더 달콤한 지금의 유혹을 맛보아도 괜찮다. 가끔은 먹 부림을 해도 좋다. 이렇게 생각하니 주말 아침에만 들리는 새 소리가 평일 아침에도 들리기 시작했다. 내년의 내 모습을 고민하다가, 지금 모습이 만족스러워서 내년 또한 그러겠거니 생각한다. 只今(다만 지, 이제 금)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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