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門 (창창, 문문)
오래전부터 창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건 아니고, 내가 창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창문은 부동산에서 집을 알아볼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 나의 로망을 한껏 펼칠 수 있는 아이템이다.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창문은 윗 변이 아치형이고 테두리를 나무틀로 짠 고전적인 형태다. 크기는 양손을 쫙 펼친 너비에 그보다 긴 높이면 좋겠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이 방 안 깊숙이 들어오면 훨씬 좋겠다. 또 뭐가 있을까. 창틀 밑에 늘어지는 식물 바구니를 몇 개 걸쳐 놓으면 밖에서 볼 때엔 화사하고 안에서는 흙 냄새가 나서 행복하겠지.
좋아하는 창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미취학아동시절에 썼던 <풍선>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그 시절에는 풍선에 꽂혀서 시까지 짓곤 했었다. 당시 나는 그 지역에서 제일 좋다는 평을 가진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시대에 앞선 창의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작품활동을 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 중 가장 자신 있는 글쓰기 시간에 자유 주제로 풍선을 골랐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풍선이 얼마나 알록달록한지, 하트 모양이나 별 모양 풍선은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해 찬양하는 시였다.
왜 풍선을 좋아했을까. 아마도 풍선을 손에 쥐는 날은 특별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일년에 몇 번 없는 축제 같은 날들. 이를테면 어린이날이나 생일, 그리고 운동회 같은 축제에서 여기저기 떠 있는 풍선을 보고 눈에 깊이 새겼을 것이다. 숙제를 할 필요도 없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어리광을 부려도 어른들이 웃으면서 바라보는 행복한 순간들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어린시절이 꽤 척박했나 싶기도 하다. 아니면, 내가 어떤 순간을 좋아하는지 직접 서술하기보다는 풍선으로 그 느낌을 대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동시의 제목이 <어린이날>, <내 생일>, <우리학교 운동회>였을 수도 있겠다.
유년시절의 나는 <풍선>이라는 시를 지으며 행복해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창문>이라는 글을 통해 서른살의 꿈과 희망을 찾는다. 다음달 수익과 지출의 차를 계산하며 가계부를 적는 것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 하지만 어린 아이처럼 갖고 싶은 것을 순수하게 그려내면 그건 다음달 수익의 증가가 아니라 커다랗고 아름다운 창문이 여러 개 있는 집이고 이런 상상은 즐겁다.
동시를 썼던 그 유치원은 유명한 곳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새벽부터 줄을 서서 입학 신청서를 냈단다. 색깔 이름이 붙은 반이 예닐곱개 되고 아이들은 모두 황토색 반바지에 멜빵이 달려 귀엽고 의젓한 원복을 입었다. 대형버스 수 대를 동원해 체험학습을 다니고 겨울에는 스키캠프도 다녀오는 등 부족함 없이 즐거운 시절을 보냈다.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의 놀이시간에 투자를 많이 했고 창작활동도 놀이로 승화해 엉뚱한 작품을 마음껏 자랑하게 했다. 다섯 살이 되던 해의 그 풍족한 기억은 어른이 된 지금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이러쿵저러쿵 글을 쓰는 습관으로 남아있다.
유년기의 강렬한 기억들은 성년기에 겪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향을 그 사람에게 준다. 물론 척박하다고 느낄 만큼 좋지 않은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풍족한 시간이 오감에 남아 어른이 된 지금도 현실의 피로감을 충분히 보듬어 주는 것 같다. 일터에 다녀오고 가계부를 적다 보면 기운이 빠지는데 나만의 창문을 글로 그리면 현실에서 고갈된 에너지가 뭉근하게 차오른다. 듬뿍 올라간 에너지는 또 다시 현실에서 쓰이고 상상 속 창문은 조금씩 현실에서 다가오고 있으니 멋진 선순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