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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상 Oct 08. 2020

토막글 003 [메일함]

mail函

나는 노트북 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 각종 서류를 전자발급으로 처리하면 더 편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노트북을 여는게 탐탁치 않아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참 비효율적이다. 인터넷으로 할 일이 있어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룬 뒤에 낑낑대면서 책상에 앉는다. 오늘은 드디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 이유를 알아냈다.


바로 메일함이다.


컴퓨터로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 같다. 노트북은 업무에 필수인데다가 이메일로 주고받는 업무는 늦지 않게 처리해야한다. 그리고 그 메일들이 볼드체 제목을 자랑하며 차곡차곡 쌓이는 곳이 바로 메일함이다. 그런데 그깟 메일들이 뭐라고 날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는지, 어려운 일들도 아닌데 괜히 못 본 척 피하고 싶다.


메일함은 마치 냉장고 같다.


반 정도 먹고 남은 배달음식과 엄마가 정성스레 만든 밑반찬, 그리고 언제부터 들어앉아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냉동고 속 고기들. 그 중 가장 무서운 건 부피도 크고 밀봉도 제대로 되지 않은 배달 음식이다. 일회용 포장 용기에 담긴 배달음식은 죄가 없다. 냉장고 속에 들어가면 있던 식욕도 사라지는 내게 문제가 있다. 늘 다시는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며칠 지나면 현란한 마케팅의 현장 속에 빠져들어가 뭔지 모를 2~3만원 짜리 음식을 시키고 만다. 주문확인을 누르던 엄지손가락을 탓 할 수도 없다. 왜 배달비는 받으면서 최소 주문 금액을 지정해두는 건데! 열 받는건 덤이다.


냉장고 속 음식은 그 시일이 오래될수록 점점 마음속에서 멀어진다. 3일이 지나면 음식으로 보이지 않고, 언젠가 처리해야 하는 볼품없는 냉장고 터줏대감으로 보인다. 그게 딱 메일함 속 읽지 않은 메일들을 보는 심정과 같다. 정해진 기일은 없지만 웬만하면 빠르게 답장을 줘야하는 메일들. 이것들을 흐린 눈으로 보면 어느 순간 처리해야만 하는 “냉장고 속 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 일은 일이지. 진작 확인했으면 별일 아닌 일들.


아주 드물게 의욕이 샘솟아 대청소를 하는 날이 있다. 나는 그런 날을 놓치지 않고 집안 청소 뿐 아니라 메일함과 캘린더까지 싹 정리한다. 그러고나면 얼마나 후련하고 상쾌한지 모른다. 이러려고 일부러 남겨뒀나 싶을 만큼 깨끗이 처리한다. 그치만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이전과 같은 상태가 되어간다. 메일함에는 서서히 볼드체 제목을 가진 메일이 늘어가고 냉장고에는 청소를 기다리는 음식물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오늘은 날이다. 가을이 완연히 익었고 몇 주 지나면 눈 발이 흩날릴 것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고 했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서 냉장고도 메일함도 쓸고 닦으련다. 메일함은 너무 무서우니까 냉장고부터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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