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 열두발자국 02
제가 2008년에 터키의 한 의학회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았어요. 이스탄불 옆에 테키르다라는 작은 도시에서 학회가 열리는데, 제가 했던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아동에 대한 뇌파 연구'에 대해 발표해달라는 초청이었습니다. 덕분에 터키를 처음 가게 됐습니다. 이스탄불, 비잔틴 제국의 수도. 동서양이 만나는 곳! 그래서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터키로 떠났습니다.
테키르다까지 이스탄불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서, 공항에서 차를 빌리고 운전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학회에서 보내준 자료들을 모두 프린트해서 가방에 넣고, 11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내렸습니다. 학회 발표 당일 오후 1시 도착이었습니다. 제 발표는 그날 저녁 8시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제 발표가 학회의 마지막 발표였습니다. 혹시나 늦을지 모르니까 저를 맨 마지막 연사로 해달라고 요청했거든요.
이스탄불에 내려서 차를 빌리고,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테키르다라는 곳으로 지도를 옆에 끼고 출발했습니다. 정말로 두 시간 정도 운전을 하니 테키르다가 나오더군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학회가 데키르다에서 열린다는 건 알겠는데, 테키르다 어디에서 하는지는 모르겠는 거예요. 제가 터키의 학회에 발표하러 간다는 사실은 몇 달 전에 결정됐는데, 그동안 그 학회가 데키르다 어디에서 열리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어본 적도, 주최 측으로부터 들어본 적도 없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거죠. 저는 아마도 데키르다가 아주 조그만 동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가면 '축 환영' 같은 플래카드가 붙어 있고, 도저히 길을 잃을 수 없는 상황에서 '여기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거죠. 알고 보니 테키르다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산 정도 크기의 도시였어요.
도착했더니 오후 4시 무렵. 제 강연은 저녁 8시. 차를 타고 미친 듯이 데키르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학회가 열릴 법한 곳들을 뒤지기 시작한 겁니다. 먼저 제일 큰 호텔로 가서 "여기서 혹시 오늘 학회가 열리고 있나요?"라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혹시 어디서 열릴 거 같으세요?"라고 묻고, 다음 호텔로 가서 같은 짓을 반복했습니다. 큰 호텔들을 다 돌아다녔는데, 결국 허탕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대학.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플래카드를 봤는데 어디에도 없어요. 시간은 거의 7시 반. 이제 30분빡에 안 남았는데 저는 덩그러니 그 도시 한복판에 있는 거예요. 어느 웹페이지에도 '데키르다'까지만 나와 있었어요. 운전하면서 미친 듯이 도시를 헤매는데, 라디오에서 8시 시보가 울리더군요. 저는 아직도 그 도시 한복판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 상황이 되니까요. 사람이 참 희한하게도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도, 그래서 도착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계속 학회 장소를 찾아 헤매게 되더라고요. 밤 10시까지 그 도시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학회가 도대체 어디에서 열렸던 걸까를 생각하면서... 사실 밤 10시에 그 학회가 어디에서 열리는지를 알게 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다 끝났을 텐데요. 그런데도 미친 듯이 계속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 도시를! 그 지도를 보면서요. 차로 테키르다를 돌아다니는 4시간 동안 '아, 나는 이제 학계에서 매장되는 것인가', '다시 터키에 입국할 수 있을까'. '너무 미안하다' 등등 제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다 났겠죠. 제가 오늘 이 강연에 안 왔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웃음) 그렇게 그 도시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나서 10시쯤 되어서야 제정신이 들더라고요. 자, 이제 깨끗하게 포기! 마음 깊숙한 곳에 엄청난 짐이 있으나, 그쯤 되니까 자포자기가 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저는 아까 돌아다니면서 봐 두었던 작은 호텔에 들어가서 잤어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런 반전은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학회 장소가 바로 이 호텔이었더라 같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그건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에요. 그 호텔에서 그냥 푹 잤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그 마을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었어요. 어제 봐 두었던 제일 좋은 산책로를 걸었고, 제일 근사한 호텔에서 점심도 먹었어요. 바닷가를 걷고, 산도 탔어요. 저는 그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이스탄불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제가 전날 미친 듯이 도시를 돌아다녔잖아요. 그랬더니 머릿속에 데키르다 지도가 훤히 그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침은 어디서 먹고 싶다. 여길 걷고 싶다. 점심은 여기서 먹으면 좋겠다. 이 산은 올랐으면 좋겠다. 이 꽃길을 다시 가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그 도시의 진짜 좋은 곳을 모두 즐기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평소 길을 잃어본 경험이 별로 없죠. 길을 잃어본 순간,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지도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방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연구실 대학원생들 외에 학부 학생이나 다른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목요일 오후마다 면담을 해요. 학생들이 저와 만나서 고민을 얘기하잖아요. 그 고민의 70퍼센트는 이런 거예요. '내가 하고 있는 게 재미없는 건 아니다. 하려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절실함이 없다.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대게 이런 식입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를 알려면 세상에 대한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싶은지,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내가 그린 그 지도 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학교는 젊은이들에게 지도 기호와 지도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착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길 찾기를 열심히 훈련시켜 세상에 내보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지도를 그리는 일입니다. 누구도 여러분에게 지도를 건네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지도는 여러분 스스로 그려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나는 어디에 가서 누구와 함께 일할지,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10년 후 지도는 어떤 모습일지, 나는 누구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지,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지도 위 어디에 있는지,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아무도 여러분에게 지도를 주지 않아요.
세상에 나온 우리는 적극적으로 방황하는 기술을 배워서 자기 나름대로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더라도 수많은 시도를 해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직접 가서 여행하고,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면서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전체적인 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해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도를 그리기 위한 '방황의 시간'을 젊은이들에게서 박탈하고 있습니다. 학기가 끝나도 방학 동안 끊임없이 스펙을 쌓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뒤로 밀리는 세상으로 그들을 내몰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에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지 못하면 40대, 50대, 60대가 되어도 남의 지도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먼저 세상을 살아낸 여러분에게 후배들은 틀림없이 물어볼 겁니다.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요?' 젊은 시절 지도 그리기를 게을리하면, 여러분만의 시각이 담긴 지도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지도를 그리는 빠른 방법이란 없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시간만이 온건한 지도를 만들어줍니다.
좋은 선택에 관해 뇌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이 밝혀낸 연구결과는 '유치원생의 마음으로 일단 시도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시도가 시도 자체로 끝나지 않고, 나만의 지도를 그리는 데 기여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근사한 선택들이 기다리로 있기를 기대합니다. 인생을 마라토너가 아닌 탐험가의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기대합니다.
(정재승, 열두발자국 中 '나만의 지도를 그리는 법' 발췌 및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