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 열두발자국 03
'결핍이 욕망을 낳는다'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놀랍고 쉽게 간과되고 있지만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진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결핍 없는 삶'을 원한다.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결핍되었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마감효과 deadline effect'는 마감이 다가오면 갑자기 효율이 늘어나고 결과가 좋아지는 효과를 말한다. 시간이라는 자원이 결핍되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집중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게다가 결핍은 동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점심시간 무렵에 진행된다면 밥을 주고 실험을 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보통 식사를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성실히 실험에 참여한다.
때론 장애물이나 방해물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것을 잃거나 결핍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욱 강력하게 원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식이 집에 데려온 신랑감 혹은 신부감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자식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들의 사랑을 불붙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엔 절대 허락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는 것이다. 사랑은 방해물을 만났을 때 더욱 숭고해진다. '부모의 반대'라는 역경이 그들의 사랑을 '매우 결핍된 소중한 것'으로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재승 교수의 어린 시절 일화)
저희 부모님은 '애들이 무슨 공부냐', '애들이 무슨 책을 읽냐' 하시면서 계속 나가서 뛰어 놀라고만 하셨어요. 그러면서 당신들은 책을 즐기고 열심히 읽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 '책은 굉장히 재밌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어른들이 우리한테는 숨기고 그들만 즐기고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빨리 자라고 부모님이 불을 끄면 자는 척하고 있다가 일어나서 다시 불을 켜고 읽지도 못하는 책을 펼치고 혼자 책을 읽는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 책들을 반드시 읽고 말리라!' 생각하곤 했죠.
어린 시절 책에 대한 결핍이 늘 책을 가까이하는 오늘의 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독서는 습관이 되기 힘듭니다. 독서가 쾌락이 되어야 평생 책을 읽는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쾌락이 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책을 읽으라고 강요해선 안됩니다. 스스로 책을 즐길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결핍을 경험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데 있다. 아이가 수학에 관심을 갖기 전에 이미 부모가 아이에게 숫자를 가르쳐 준다. 외국인과 대화하고 싶다거나 영어로 된 영화 대사를 이해하고 싶다고 느끼기 전에, 영어캠프를 경험하게 해 준다.
스스로 학교 공부의 부족함을 깨닫기 전에 부모가 알아서 가장 좋은 학원을 알아보고 그곳에 보내다 보니, 요즘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 이거 너무 하고 싶어!' 해서 뭔가를 배우는 시간, 무언가 열심히 활동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젊은이들이 종종 묻는 질문 중에 하나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뭘 골라야 하나요?"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대개 성공한 멘토들은 쿨하게 "인생은 짧습니다. 진정 좋아하는 걸 하세요!"하고 답한다. 하지만 실상 이 질문은 상당히 사치스러운 질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잘하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잘하는 게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잘하는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즐길 가능성이 높다. 더욱 안타까운 건 좋아하는 서도 생각보다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 뭔지 찾을 시간이, 기회가, 경험이 별로 없다.
이러한 현상이 '결핍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