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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모 Sep 03. 2021

4. 학생이 교수에게 돈을 빌린다고?!

2016년-2017년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수영 쳐야 하는 돌고래를 아쿠아리움에 가두면 어떻게 될까

돌고래의 평균수명은 40년에 달하지만 아쿠아리움에 갇힌 돌고래들은 7년 정도밖에 못 살고 대부분 조기 폐사한다고 한다.


대학교가 내겐 그 아쿠아리움처럼 느껴졌다.

꼭 졸업만은 해달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을 이뤄드리기 위해 복학을 했지만 여전히 학교는 재미가 없었고 전공 공부 또한 여전히 어렵기만 했다.


관심사와 적성에 따른 극명한 온도차. 내가 관심 있어하는 분야는 A+, 전공은 D0


특히 복학 후 두 번째 학기였던 2016년 2학기 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결국 아쿠아리움에 갇힌 돌고래처럼 내 몸에도 문제가 생기게 됐다. 


어느 날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왼쪽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갑자기 소리가 잘 안 들렸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좀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진 않았었는데 그 증상이 며칠이나 지속되어 결국 병원에 가게 됐다.


진단 결과 '돌발성 난청'이라는 말을 들었다. 원인 불명에 완치율도 30%밖에 안 되는 병이라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도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귀 한쪽이 안 들린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생각보다 큰 불편을 일으켰다. 사람 많은 곳에서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입모양에 집중을 해야 했고 왼쪽 편에 걷는 사람의 말은 안 들려서 내가 항상 사람을 오른편에 두고 걷게 되었다. 그리고 한 쪽귀로만 모든 소리를 듣다 보니 너무 시끄러운 곳에서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래도 그동안 두 번의 슬럼프를 겪으면서 멘탈이 강해졌는지 심적으로 우울하진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내가 성공하면 어디 인터뷰할 때 이야깃거리로 써먹어야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굉장히 좋아하는 배우인 곽도원 배우님도 2016년 연말 한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으로 한쪽 귀가 안 들린다고 고백하셨는데 그게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이때 이후로 스트레스를 관리하려고 노력하게 됐는데 가장 많이 변한 건 술을 거의 안 마시게 된 것과 취미생활의 변화였다. 원래 술자리도 좋아하고 사람 많은 곳을 좋아했는데 왼쪽 귀가 안 들리고 난 후엔 독서, 혼자 영화보기, 해외축구 보기, 드라이브 등 주로 조용한 곳에서 혼자 즐길 수 있는 것들로 취미가 바뀌었다.


또 하나 크게 바뀐 점은 내가 하고 싶은 걸 더 이상 미뤄두지 말자고 마음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 예고도 없이 왼쪽 귀가 안 들리게 된 것처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 짧은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복학한 지 1년 만에 일을 벌이게 된다.


휴학 기간엔 항상 학교 밖에서 일을 벌였다면 이번에는 학교 안에서 학생들과 함께 일을 벌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특히 나처럼 별 재주는 없지만 별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는데 그래서 핵심 키워드로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웠다. 우리, 뚜렷한 능력은 없지만 뭐라도 해서 먹고살자는 것이었다. 

물론 학교에 이미 창업동아리가 있긴 했다. 그런데 그 창업동아리는 너무 능력자들만 모여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IT나 기술창업 쪽에 치중된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학교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소모임 모집 공고를 올렸다. 소모임 이름은 튀는애들이라고 지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면서 내가 주변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너 좀 튄다'라는 말이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딱 어울릴만한 이름이었다.

이 특이한 공고를 보고 꽤 많은 학우들이 신청을 해주었고 그중 면접을 통해 11명을 선정하게 됐다.


각 학과에서 이상하다 싶은 애들은 다 모인 12명의 튀는애들(좌), 동묘에서 구제옷 사입고 간 부산엠티(우)


이렇게 모인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모여서 앞으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할지 회의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인원이 12명이나 되다 보니 매번 카페에서 모여서 회의하기엔 불편함이 많았다. 정식 동아리로 인정받아서 동아리실을 배정받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하기로 한 프로젝트는 우리만의 아지트 만들기였다.

그땐 정말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는데 월세 30만 원짜리 방을 구해서 월세를 나눠 내면 카페에서 커피 사 먹는 돈보다 싸게 먹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처럼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정 금액을 받고 빌려주면 거뜬히 한 달 월세는 벌어서 우리는 공짜로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행동력 스탯만 만렙인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예산계획도 없이 무작정 방부터 알아보러 다녔다. 학기 중에 시간 나는 대로 서울 전 지역의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20군데가 넘는 방을 살펴봤다. 그러다 정말 딱! 마음에 드는 방을 보게 되었다.


옥탑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


서울역 근처에 있는 옥탑방이었고 뷰가 말도 안 되게 좋았다. 남산타워와 서울역 인근의 높은 건물들이 한눈에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처음 조건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이었는데 사정사정해서 보증금 120만 원에 월세 35만 원으로 조건을 낮출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보증금 120만 원은 학생 입장에선 굉장히 큰돈이었는데 여윳돈이 되는 사람들에 한해서 십시일반 돈을 모았고 그렇게 계약을 하게 됐다.


첫 고비는 넘겼고 그다음 고비는 인테리어였다. 공간을 그대로 사용하기엔 너무 낡아있었고 남들에게 빌려주기에도 너무 초라한 공간이어서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어쨌든 셀프 인테리어를 해야 했다. 그 비용이 어림짐작으로 200만 원 정도 필요했다. 이미 우리는 각출해서 보증금을 마련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낼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학교에 도움을 청해 보기로 하고 학교 창업지원단에 찾아갔다.

학생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인 창업 소모임임을 열심히 어필하면서 혹시 학교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이 없는지 물어봤지만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학생 개개인들에게 학교 차원에서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지원해 줄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방법이 없을지 끈질기게 여쭤봤고 그 직원분은 마지못해 한 교수님을 추천해주었다.

"작년에 새로 오신 경영학과 교수님이 있는데 그분이 창업 관련 담당이니까 그 교수님한테 한 번 찾아가 봐요 그럼."

그 직원 분은 그냥 하신 말씀이겠지만 나에겐 실낱같은 희망이자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직원분에게 그 교수님의 연락처를 받아서 바로 연락을 드렸고 교수님 사무실로 한번 찾아오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복학해서 잘 몰랐는데 후에 알고 보니 학생들 사이에선 이미 그 교수님이 자수성가한 부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그 교수님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일단 우리 학교 출신이셨고 주식 쪽에선 엄청 유명하신 분이었다고 한다. 주식 투자와 엔젤 투자로 큰돈을 버시고 경제적으로는 은퇴를 하시고 후학 양성을 위해 학교에 돌아오신 전설적인 선배님이자 교수님이셨다. 이런 정보들은 나중에 알게 된 것들이고 교수님을 찾아뵐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창업 담당하시는 교수님이구나 하고 찾아갔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교수님 사무실 문을 두드렸는데 안 쪽에서 생각보다 되게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긴장한 채 교수님 방에 들어갔는데 일반적인 교수님 이미지와 다르게 엄청 젊은 분이라 꽤 놀랐다.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은행 창구원같은 상냥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셔서 오셨나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내가 이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은행 직원 같은 친절한 그 말투에 나도 모르게 진심이 툭 튀어나와버렸다.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돈이 필요합니다.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얼마가 필요하신가요?"


"200만 원이 필요합니다. 학우들끼리 모여서 공간을 하나 구했는데 그 공간을 꾸며서 이러이러한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200만 원을 빌려주시면 셀프 인테리어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계좌번호가 뭔가요?"


"네??? 아... 상환계획도 말씀드리자면 매달 20만 원씩 갚아나가겠습니다."


"네 천천히 갚으세요.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황당하게도 며칠 동안 고민했던 셀프 인테리어 비용 마련은 이렇게 5분 만에 해결이 되었다.

훗날 예정했던 상환계획대로 모두 상환한 후에 교수님께 여쭤봤었다. 왜 바로 빌려주셨냐고.

교수한테 돈 빌리러 오는 학생을 처음 봐서 신기하기도 했고 돈 빌리러 온 사람 답지 않은 당당함에 대체 뭘 하려고 그러나 하고 200만 원쯤 없는 돈 셈 치고 빌려줬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빌린 소중한 200만 원을 가지고 여름 방학 내내 땀 뻘뻘 흘리며 직접 셀프 인테리어를 했다.

페인트 칠하고 옥상까지 나무 올리고 톱질하고 못 박고 화단 흙 퍼내고 인조잔디 깔고 벽 부수고 바닥 장판 깔고 조명 연결하고 등등... 피부가 까맣게 탈 정도로 고생하며 만들었다. 이때 습득한 기술들로 웬만한 작업은 직접 다 할 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대규모로 셀프 인테리어를 해본 사람이 팀에 한 명도 없었지만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치니 꽤나 그럴싸한 모습으로 인테리어가 완성되었다. 대학생들끼리 모여서 이런 아지트를 직접 만든다는 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셀프 인테리어 과정이 담긴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렸었는데 꽤 많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언급이 되며 화제가 됐었다.


단순하게 커피값 아끼자고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지만 어쨌든 처음 목표대로 커피값은 확실히 아낄 수 있었다. 이 공간은 야경이 너무 이뻐서인지 파티룸으로 사용하려는 수요가 많았고 월세 이상의 운영수익이 생겨서 교수님께 빌린 돈도 무난하게 갚아나갈 수 있었다. 


이 공간은 한 후배가 이어받아서 지금까지 파티룸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 2017년에 만든 공간이 2021년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비록 이 공간을 통해서 당시에는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었지만 같이 만들었던 팀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때부터 공간이 가져다주는 가치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공간사업을 계속해나가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공간은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졌다. 그 이야깃거리는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런 과정들이 공간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리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 개인적인 목표에도 부합했고 이 목표를 공간을 통해서 실현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교수님께 빌렸던 그 200만 원이 티구시포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다음 편 읽기 5. 우연으로 시작된 공동창업자와의 창업




<4편 TMI>

'티구시포'라는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티구시포가 튀고싶어를 귀엽게 표현한 것이라는 건 모두 다 아실 겁니다.

이 티구시포라는 이름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요?

튀는애들이 200만 원으로 만들었던 아지트의 이름이 바로 T90호였습니다.



아지트를 만들고 나서 이름을 정해야 했는데 당시에 나왔던 여러 의견들 중 가장 매력적인 이름이었습니다.

2017년에 스무 살, 그러니까 17학번이었던 한 후배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는데 튀는애들이 만든 공간이니까 튀고 싶다는 뜻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면서 냈던 이름이었습니다.


뭔가 우주로 높이 솟구치는 로켓의 이름 같기도 하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이름 같기도 하고 아파트 호수를 표현하는 방식 같기도 했던 이 오묘한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네요.

다만 영어, 숫자, 한글이 혼합된 T90호라는 이름은 많은 분들에게 브랜드 이름을 인지 시키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티구공, 티구십, 티구공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2019년에 한글로만 표기한 티구시포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튀고싶어에서 파생된 브랜드네임인만큼 

튀고싶어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튈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브랜드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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