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한 켠에 놓여진 시집_나의 휴식처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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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까닭에 무성의 시인에게는 시 한 구절 없고
무색의 화가에게는 아주 작은 그림 하나 없어도
이렇게 인간 세상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번뇌를 해탈하는 점에서,
이렇게 청정한 세계에 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이 특별하고 유일한 천지를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사리 사욕의 굴레를없앤다는 점에서
부잣집 자식보다도,
군주보다도,
속계의 모든 총아보다도 행복하다.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
삶이 힘들다던가 답답하다거나
그런 연유는 아니었으나
'책을 읽어야한다' 라는 압박감에서는
허우적 대고 있었고,
모든 걸 잊고 잠시 내려놓고 싶은
그런 순간들은 찾아오기 마련.
이런 시점에 2017년 세계 도서전에서 우연히 만난 '명량의 둘레' 시집.
가방이 무거워 두터운 책을 사고 싶지 않았고,
읽어야할 책들과 읽고 있는 책들이 너무 많아
새로운 책을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그 때.
지나치게 어두운 시들은
못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특히나 가난을 소재삼아 쓴 시들은 징징거리는
그네들의 일상을 다독여줘야할 것만 같은 부담스러움이 있었다.
소장할 만한 시집이라면
밝고 명량한 시를 만나고 싶었고,
닿지 않은 선반에 놓은 이 책을 굳이 점원을 불러
인생에 두고두고 기억할 시집을 사게 되었다.
시를 마주했던 순간들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한글을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
부터 시작해서
‘언어를 가지고 즐겁게 논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깨달음의 순간들이 온다.
시를 한 구절 구절 마주할 때마다
감동의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지고
그 물결이
머리속 깊은 곳까지 퍼져나가는 느낌이다.
이 한자 한자 쓰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지,
밤새운 새벽 끝에 생각의 응축덩어리들을
풀어 써내려가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마음에 와 닿았던 시 두 편의 일부를 공유한다)
봄의 전령은
뚜우뚜우우 나팔을 불며 오지 않는다
논밭두렁에 낮게 엎드려
배밀이 하는 꽃다지, 제비꽃, 질경이,
소리쟁이의 걸음마로 온다
영동엔 봄눈이 내리고
영서엔 꽃샘바람이 불어
걸음마하던 봄꽃의 살갗이 트고
겨우내 거실을 덥히던
연탄난로의 철거를 미루었다
털벙거지 다시 꺼내 뒤집어쓰고
모처럼 나선 산책길,
죽은 아카시아나무 한 그루가
불쑥 내 보행을 간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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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밤길을 걷는다
오랜만이다
밤의 길잡이인 양 떠오른
그믐달의 손을 잡고
호젓하게 걷는다
오랜만이다
잠깐 함께 걷다 사라진 그믐달은
이레째 된
내 묵언의 입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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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조등 같은 조그만 별들이 손을 내민다
그 손 마주잡고 내려오며
그믐달도 사라진 밤
내가 써야할 유서에 대해 생각한다
슬픔도 기쁨도 여읜
길도 흉도 여읜
호젓한 밤과
이별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시를 가까이 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모든 약속도 할 일도 없는 그런 나른한 오후 주말,
서점에 하릴없이 시간 보내다가
우연히 시집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일상은
나에게 너무 먼 존재였을까.
우리네는 너무나 많은 일들, 대화들,
그리고 자극적인 콘텐츠들에 노출 되어 있기에
서점 저 한켠에 물 머금은 물망초처럼
조용히 손길을 기다리는 시를 발견하기에
쉽지 않았을까.
삶이 너무 촘촘해서 그리고
너무 쉴 새 없이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 때,
가끔 마음 속에 쉼표를 찍고 싶을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시를 읽고 싶다’ 였다.
결국 시는
나에게 있어서
적극적으로 읽는 책보다는
' 이동 중에 뭔가를 읽고 싶은데
기존에 읽던 책은 너무 무겁거나 부담스러울 때’
'뭔가를 읽고 싶으나 집중하기엔 피곤해서
편한 마음으로 글을 읽고 싶을 때' 찾는
그런 푹신푹신한 소파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읽고 싶은, 읽어야 할 책이 너무너무 많은
우리네의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는 쉼표로 시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시간에 쫓기듯 하루하루 팍팍하다고 느끼는
일반인들의 일상에 설렘으로 스며들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