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몸에서 눈이 떨어졌다.
그날 저녁 엄마는 레고 보물선을 가지고 왔다.
다음날 일찍 엄마는 다시 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갔다.
산업재해로 입원한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뛰쳐나간 엄마가 돌아온 그날은
그 사고가 있고 6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때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가끔 찾아오는 친척들에게
착한 엄마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서야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에게 사업자금, 대학 등록금, 생활비와 사고 수습비용을 받아간 아버지의 형제들 중 누구도 아버지의 간병을 거들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할머니조차 다른 형제의 자식들을 돌본다고 아버지에게 오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9살과 11살이었던 우리 남매의 양육도 아무도 맡지 않으려 했다.
그날 엄마의 몸에서 떨어진 것은 각질이었다.
하루아침에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다리를 잃은 본인을 대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자살을 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고 한다.
그 모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간병한 사람은 오직 어머니밖에 없었다.
6개월 만에 자신의 자녀들을 보기 위해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친구 한 명이 간호를 자청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남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서 레고 보물섬을 샀으리라...
하지만 씻을 시간도... 본인을 돌볼 시간도 없었으리라...
각질 떨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자식들이 보고 싶었으리라...
난 그날 엄마 품에서 금방 잠들었지만...
누나와 엄마는 눈물 흘렸으리라...
이제야 알 것 같다.
다음날 엄마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한 솥 끓이고는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집을 떠났다.
나는 그 김치찌개가 좋았다.
원래 네 가족이 모여서 점심을 먹을 때는 동원참치가 들어간 김치찌개였다.
누나와 서로 큰 조각을 먹으려고 다투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날은 돼지김치찌개였다.
억측이지만, 그날 이후 난 참치 김찌찌개보다는 돼지김치찌개를 찾는다.
이제야 보인다.
엄마가 각질을 떨어뜨렸던 그 집은 막내 이모와 삼촌이 살던 집이었다.
J이모는 병원 간호사였고, S이모는 판매일을 했다. Y삼촌은 재수를 할 때였나 보다.
그들은 거의 집에 없었다.
당시 나는 9살이었고 조금은 보육이 필요한 나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내 주변은 공허했다. 나보다 2살 많던 누나가 분명 항상 옆에 있었을 것임에도 당시 내 기억 속에는 누나도 흐릿하다.
이제야 동정이 보인다.
난 그때 돈이 많았다. 나이키 마크가 조악하게 박힌 캔버스 지갑 속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병원에서 만난 아버지의 지인들을 나에게 꼭 용돈을 주었다. 난 그 용돈을 모두 그 지갑에 넣어두었다.
쓰는 곳이라고는 가끔 오락실을 가는 정도였다. 이상할 정도로 무엇인가를 사 먹은 기억은 없다.
친구와 그 친구의 형이 기억 속에서 잠깐씩 같이 노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다.
1992년 겨울 대구에 눈이 왔다. 대구에는 눈이 잘 쌓이지 않는데 그날은 눈이 왔다.
엄마 아빠는 병원에 있었다. 하지만 밖은 하얗게 눈이 쌓였다.
전깃줄에도 눈이 쌓였다. 2층 집에서 난 그 바깥 모습을 지켜봤다.
밖으로 뛰어나가 눈을 밟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난 그저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냥 바라봤다.
이제 보인다.
난 놀랬었나 보다. 아무런 감정 표현도 하지 않았던 나는 상당히 놀랬었나 보다.
누나가 우는 모습을 보며 따라 울어야 할 것 같아 억지로 울었던 나는 정말 몰랐었나 보다.
38살. 7살, 4살 아들을 재우고 조용히 앉아 있으니 이제야 9살의 내 감정이 보이나 보다.
잠들기 전까지 비행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내 아들보다 겨우 2살 많았을 뿐인 거다.
아직도 제대로 위로받지 못해서인가...
이제야 그때 생각을 하며 울고, 울다가 그때의 감정을 적는다.
나는 정말 몰랐나 보다.
이제야 그 감정이 느껴지나 보다.
안아주고 싶다.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화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리광 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