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는 애처롭다. 사물이나 행동을 뜻하는 단어의 앞에 ‘생계형’을 붙여 보라. 그 애처로움이 한발짝 다가온다. 인터넷에서 ‘생계형’을 검색하면 이런 말이 나온다. 생계형 범죄, 생계형 적합업종, 생계형 저축, 생계형 창업 특별보증 같은 단어이다.
명동 길거리의 노점에 대한 기사에서 생계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지금은 명동의 노점이 양성화되었지만, 과거에는 급격히 늘어나는 노점을 단속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노점을 생계형 노점과 기업형 노점으로 나누었다. 겨우 먹고 살 정도의 돈을 버는 노점을 생계형 노점, 돈을 남길 수 있을 정도로 잘 버는 노점을 기업형 노점이라고 했다.
내 인생에도 생계형이라고 부를 몇 가지가 있다.
나의 골프는 생계형 골프였다. 나는 골프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 치지도 못했고 잘 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연습을 할 리가 없었고 구력이 30년이 넘었어도 실력은 초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업무상 필요해서 할 수 없이 골프를 쳤다.
어느 고객을 모시고 접대 골프를 할 때 생계형 골퍼라고 밝혔다. 그분은 골프를 잘 쳐서 내기에서 딴 돈으로 생활비를 버느냐고 농담을 했다. 생계형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회사를 퇴임한 이후에 골프 은퇴를 선언했다. 더 이상 일 때문에 골프를 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골프장에서 주로 만났던 친구나 선후배를 따로 만나야 하는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생계형의 애처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MBTI 검사를 받은 것은 30년도 더 된 대리 승진자 교육 때였다. 나는 ISTJ였다. 필요한 부분만 설명하자면 ‘I’는 ‘내향적인 사람’(introvert)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40대 중반에 다시 검사를 해 보니 ESTJ가 나왔다. ‘E’는 ‘외향적인 사람’(extrovert)을 의미한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검사자는 피검사자의 현재 상태나 하는 일에 따라 전과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원래 약간 내향적이었는데 일의 성격이 영향을 주어 약한 외향성을 보이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일리가 있었다. 당시 나는 컨설팅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찾아다니고 만나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은근히 자랑도 하고 일을 맡겨 주면 잘 할 수 있다고 자신감있게 이야기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내가 ESTJ라고 하면 지인들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도 잘 하고 동문회 총무, 부회장, 회장을 20년 가까이 지냈다. 심지어 노래 한 곡 해 보라고 하면 망서리지 않고 노래도 잘 한다.
그렇지만 나는 내향적인 면이 강하다.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주말에 가족들 없이 집에서 책 읽고 음악 들으면서 혼자서 잘 논다. 휴가도 유람형이 아니라 휴양형을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야 할 때는 만나지만 사교적이지는 않다. 여러 사람이 만나는 모임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모임 중에 몰입하지 못하고 딴 생각을 하거나 빨리 끝나지 않는다고 속으로 불평할 때가 많다.
그렇다. 나는 ‘생계형 E’였다. 먹고 살기 위해 30년 넘게 스스로를 외향적으로 만들었다. 아니, 외향적인 척했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사교적이고 활발하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람이라고 나를 알고 있었지만,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려고 물밑에서는 열심히 발장구를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사를 퇴임하니 꾹꾹 눌러 놓았던 내향성이 나타났다. 주말에도 서재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굳이 만나도 되지 않을 사람은 연락하지 않는다. 선후배나 친구가 보고 싶어서 한 번 식사라도 하자고 먼저 말해 놓고는 막상 연락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만날 자리도 잘 만들지 않는다. 그래도 만나자고 하면 나간다. 사람을 피하는 건 아니니까.
‘생계형 E’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몇몇 선배와 친구가 떠올랐다. 사장이나 고위직에서 퇴임하면 ‘날개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선배들 중에 모임에 잘 나오지 않거나 근황을 알기 힘든 분들이 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분들이 날개가 떨어져서 사람을 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막상 만나보면 너무도 즐겁게 살고 있다.
아마 그들도 ‘생계형 E’였을 것이다. 그들도 혼자 있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은 생계의 애처로움에서 벗어나 본인의 ‘I’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바로 ‘외향성’이 ‘생계형’을 앞에 붙였을 때 가장 고단해 보이는 단어였다.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있을 ‘생계형 E’들에게 잠시 쉬어 가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