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세요

그리운 아버지

by 박찬미


“뽀드득, 뽀드득, 내 발자국.”

1학년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다. 나는 이 동시를 공부 시간에 배우기 전에 다 외웠다. 국어 시간에 친구들 앞에서 암송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압력을 넣었다. ‘토끼와 거북이’가 나오는 단원에서는 토끼의 대사를 미리 다 외워, 연극을 하게 되면 꼭 ‘토끼’ 역을 하겠다고 떼를 썼다. 아버지는 나의 담임선생님이었다. 유치원에 돈 낭비하고 다니느니 아버지의 교실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하는 게 좋겠다며 학교에 놀러 다니듯 다녔었다. 그렇게 다니다가 호적도 몇 개월 앞당겨 고쳐서, 청강생이 아닌 진짜 1학년을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갈 시간인데 늦잠을 잤다며 아버지는 나를 깨웠다. 바로 학교 옆 관사가 우리 집이어서 곧장 양치하고 허둥거리며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온 사방이 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무슨 일일까? 교실에도 넓은 운동장에도 사람이 없었다. 무서웠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학교에 오시지 않았지?’

한참 지나 일요일임을 깨달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버지의 농담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임에도 시험을 자주 보았다. 아버지는 산수 시험을 볼 때 틀린 답을 적으면 감독을 하다가 내 팔을 꼬집었다. 처음엔 눈치를 채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어? 뭔가 틀렸구나?’

하며 문제를 다시 풀었다.

계림극장 앞 횡단보도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넜다고 경관이 경찰서로 아버지를 데려갔다. 신분을 밝히라는 말에, 교사라는 신분을 밝히기 싫어서 종이를 달라고 하였다. 모범을 보여야 할 선생이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너냐는 소리를 들을까 창피하였던 거다. 그 당시에 남산 근처 학교에 근무해서, 종이에 남산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경관이 일어서며

“가던 길 계속 가십시오.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라며 경례를 붙였다고 한다. 그 당시 위세가 당당했던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걸로 착각했나 보다. 아버지는 정장 차림 대신 후줄근한 가죽 잠바를 잘 입고 다녔었다. 어찌 보면 정보과 형사나 정보부 직원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와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막둥이 동생을 아버지는 무척 귀여워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까지 막내를 남탕에 데리고 다녔다. 하루는 남탕에서 목욕하다가, 막내와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00 이는 남탕에 다닌다!”

떠들썩하니 학교에 소문을 냈다. 그 바람에 막내는 다시는 남탕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아버지는 내가 E 여고에 합격하자 교복 입은 나를 데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인사하자며 함께 회인에 갔었다. 명문 여고에 입학한 딸을 자랑스러워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중2였던 동생 친구들을 가르쳐서 과외비를 벌었다. 아버지는 힘들게 고학해선지 용돈은 스스로 벌라고 했다. 과외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학생 한 명의 부모가 연탄가스로 사망하게 되었다. 그 일로 과외를 그만두었다. 그 후로 음식점을 하시는 어머니 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자, 한동안은 어머니 대신에 내가 동생들 도시락도 싸고 집안 살림을 꾸려야 했다.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집으로 가려는데, 노천극장을 지나며 빨간 불길을 보았다. C 여중이 불타나 했는데, 우리 학교 ‘Frey Hall’이 불에 타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터뜨리다가, 걱정하고 있을 부모님 생각에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머니가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나중에 집에 도착했다. 학교는 기자 외에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육청에서 조사 나왔다고 둘러대고는 딸이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려고 학교에 들어가셨다. 뉴스를 듣자마자 달려갔단다. 다행히 건물에 학생이 없어 인명피해는 없었다.

대학 시절, 마음은 착한 딸이 되고 싶었는데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끝없는 방황이 계속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따뜻한 온실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듯 보였고, 나 혼자만 세찬 비바람과 눈바람을 몽땅 맞는 느낌이 들었다. 원하지 않는 대학에 다닌다고 투정을 부리고, 반항의 표시로 툭하면 배낭을 메고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으로 더없이 힘들었다. 그래도 졸업 무렵에는 혼자만의 시간에서 탈피해서 제 자리를 찾은 듯 보였다.

졸업 후 무역회사에서 영문 편지 쓰는 일을 일 년 반 정도 하다가 교직에 들어왔다. 첫 봉급을 몽땅 털어 아버지께 명품 바바리코트를 선물했다. 흐뭇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첫 해외여행을 가려는 딸을 위해 동료 선생님의 캐리어를 빌려주시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캐리어가 무척 비쌌고 해외여행을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이기도 했다. 대학원 호텔경영학과에서 옥스퍼드 대학 세미나로 초청을 받게 되어 한 달간 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교직 첫해에 동 학년 선생님들과 잘 지내지 못했다. 회사에 다니던 버릇으로 화려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내가 선생님들 눈에는 마땅치 않았나 보다. 사사건건 소소한 일에 선배 교사들이 나무라는 일이 많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내 적성에는 교직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부장 교사가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본인도 교직에 있는데 딸이 아직 서툴러서 부족하지만, 딸처럼 여기고 많이 사랑해주라는 전화였다고 했다. 그 일로 진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짠돌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목욕탕에 갈 때 동생들 셋을 씻기라고 같이 가게 하셨는데, 목욕탕 요금을 제대로 준 적이 없었다. 요금이 500원이면 꼭 50원을 깎아야 한다고 450원을 내주었다. 그래서 정말 목욕탕 가는 일이 싫었다. 목욕탕 입구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사람이 없을 때를 틈타 사장님께 사정해서 가까스로 그 값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편찮으셔도 하루도 결근하신 법이 없었다. 그 흔한 제주도 여행도 한번 가지 못하고 별다른 취미 없이 오로지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17일 봉급 날이면 어김없이 한 달분의 쌀과 연탄을 직접 사놓았다.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주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병실에까지 들렸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들으면, 학생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고 하였다.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고도 지겹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혼잣말로 나는 중얼거렸다.

교직에 들어오고 삼 년 만에,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스위스로 유학을 가 호텔 종사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지금의 남편과 사랑에 빠졌다. 남편은 아버지가 기대하는 맏사윗감이 아니었다. 가난했고 같은 학교의 교사였다. 아버지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결혼을 포기하고 유학 갈 것을 제안하였지만, 난 집을 나와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기어이 강행했다. 동생들도 거의 삼사 년 사이에 연이어 결혼하게 되었다. 학교에 딸 다섯 청첩장을 뿌리면서 얼마나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해하였을까?

아버지는 승진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연구 보고서를, 종이에 깨끗하게 옮겨 적으라셨다. 그때는 종이 간격을 맞추기 위해서 ‘가리 방’이라는 종이판을 종이 위에 덧씌워 썼었다. 컴퓨터가 나오기 한참 전의 일이다. 아버지의 연구는 용돈 기입장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교무부장으로 오래 있었고 승진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생활고에 신경을 쓰다 보니 승진이 늦어지고, 주변의 후배들이 교감이나 교장으로 승진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딸 다섯 키우시며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을까?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딸들로 인한 상처가 곪았다가 터지고, 다시 상처가 되어 딱지가 앉을 틈도 없었다. 담배가 유일한 친구였다. 아버지가 폐암에 걸렸다. 폐암 발병 후, 바로 밑 동생 식구와 우리 식구와 함께 경포대로 며칠 동안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몰래 바닷가에서 담배를 태우다 나에게 들켰다. 항암 치료로 속이 매스껍다고 하였다. 폐암이 생긴 곳은 수술도 하기 어려운 부위였다.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이사 날짜가 맞질 않아 우리 집에서 두어 달 함께 살게 되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남편이 직접 공수해서 아버지를 간호했다. 아버지는, 같은 교사라고 그렇게나 반대했던 남편을 의지하고 믿음직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이상했다. 아버지가 수지의 새 아파트로 이사한 지, 일주일이 될 무렵이었다. 겨울방학이었고, 연말을 앞둔 12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전화가 왔다. 급하게 은행의 자동화 기기에서 현금을 찾는데, 돈이 나오지 않고 출금전표만 나왔다. 다행히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돈은 찾을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00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서 입원하라고 하였는데, 남아 있는 병실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일 인실에 입원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호텔비보다 비싼 일 인실에 입원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거다.

어머니는 이렇게 갑자기 입원할 줄 몰라 수저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속상해했다. 나와 바로 밑 동생은 병원 내 식당에 몰래 들어가 수저를 슬쩍 들고 왔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어린아이들을 두고 왔다며, 우리에게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이나 돌보라고 성화셨다. 그때 딸이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고, 동생도 마찬가지로 고만고만한 남매가 둘 있었다. 동생이 버스를 타고 가다 잠깐 조는데, 꿈에서 어머니가 소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고 이상하다며 다시 병원으로 왔다. 저녁밥이 일찍 나왔다. 기관지 검사 후에 먹겠다며 식사를 미루셨다. 검사를 하러 침대를 옮겨 검사실로 가는데,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내가 불쑥

“아버지,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라고 하였다, 그때였다. 아버지는 나를 노려보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말씀하시며 역정을 냈다. 나도 그 순간에 그런 말이 불쑥 나온 게 이상했지만, 아버지의 역정도 예상 밖이었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줄 몰랐다. 아버지는 내가 꺼낸 말의 의미를 파악하신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나는 그 순간에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대답을 듣기를 기대했나? 재산이라도 뚝 떼어 주길 바란 건가? 아버지는 기관지 검사 도중, 과다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폐암 발병 8개월 만이었다.


우리가 몰래 훔친 수저로, 입원실에 놔둔 저녁 식사도 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수저를 훔칠 때, 우리는 아버지가 몇 시간 뒤에 돌아가실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날 그 밥을 아버지가 당연히 잡수실 줄 알았었다. 죽는 걸 예견하지 못하고 유언 한마디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 당시엔 서운했었다.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아버지에게 들려준 딸의 마지막 말이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라니. 내가 정말 원망스럽다. 벽에 머리를 쳐서 박고 싶을 정도로 내가 밉다.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늘 자랑스럽게 여기던 딸이, 마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 툭 뱉은 그 한마디 말! 두고두고 그 한마디 말이 뇌리에 박혀있어서 괴로웠다. 꼭 내가 그 말을 그 순간에 얘기해서 돌아가신 것만 같다. 그 말은 내게 부메랑으로 돌아와 상처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여러 가지로 후회가 물밀듯 밀려온다. 아버지는 본인의 환갑에 강남의 조그만 음식점을 빌어 동료 교사분들을 초대했다. 맏딸이라고 인사를 드리자 선생님들이 노래를 청하셨다. ‘동무 생각’을 불렀다. 아버지와 함께 어릴 적 많이 불렀던 노래였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하필 왜 그런 노래를 불렀단 말인가? 외롭기 한이 없다니? 밝고 신나는 노래를 불렀어야 했다. 식사 경비를 한 푼도 보태지 못했다. 지금은 해외여행 경비 정도는 드릴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데,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공기 좋은 수지의 넓은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동생네가 운영하는 충전소가 가까이 있어서 운동 삼아서 충전소 일도 돕고, 골프장도 가까워 취미생활을 할 수 있다고 좋아하였다. 그런데 이사한 지 딱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고층의 그 아파트에서 고통이 극심해서 뛰어내리고 싶다고 하였다. 그 비싸다는 입원비는 한나절 비용밖에 되지 않았다. 퇴직금도 연금도 한 푼도 쓰지 못했다. 남편과 나의 교장 승진도 못 보고, 1995년 12월에 64세의 나이로 가셨다. 딱 지금의 내 나이이다. 얼마나 가능성이 많은 나이인가?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 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가끔 아버지는 이 노래를 불렀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형님들 식구밖에 없는 회인 고향 집을, 아버지는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 삼 형제의 막내였다. 위의 두 형님과는 나이 차가 많이 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모양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두 형님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가셨다. 생전에 눈물을 보이고, 자주 한숨을 쉬며 이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 왜 울어요?”

“응.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목이 멘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얼마 전 어머니의 생신을 전화로 축하하면서, 문득 아버지의 생신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맏이면서도 한 번도 생신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 불효 막심한 맏딸이었다. 가끔 꿈에서 아버지를 뵙는다.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아버지에게 한 마지막 말,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그 말을 다시 고쳐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버지, 많이 사랑해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꼭 안아드리고 싶다. 따스한 말을 전했던 모습으로 나를 기억하시면 좋겠다. 내가 부모가 되어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새로고침’으로 후회하는 일들을 딛고 일어서고 싶다. 훗날 부끄럼 없이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다섯 살인 나와, 진돗개와 같이 찍은 사진 속의 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꿈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향, 그리운 고향에서 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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