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는 ‘새로고침’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비가 되어
“갓 구운 빵입니다.”
오늘 글쓰기 강좌에서 선생님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식 냄새를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갑자기 잊었던 후각이 발동한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고등학교 시절, 아침이면 그 애들은 빵집에서 갓 구운 빵과 우유를 들고 와서는 교실에서 참새처럼 손으로 조금씩 쪼아 먹어댔다. 고소한 냄새는 빵 냄새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냄새였다. 교실에 퍼져있는 빵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지만, 갓 구운 빵은 내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세계에 속했기에 그것을 얻어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참 배가 고팠을 시절에, 나는 빵을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서 내가 살림을 맡아했던 시절, 점심 도시락으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경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누런 양은 도시락 뚜껑을 열자, 싯누렇게 변색한 시금치 잎이, 기름기가 식어 엉겨 붙은 볶음밥 위에 펼쳐져 있었다.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를 넣은 병뚜껑이 잘 닫히질 않아, 교과서와 공책이 벌건 김칫국물로 물들었어도, 쉰 김치 냄새가 나는 교과서를 펼 때도 나는 기죽지 않았다. 친구들은 교복 치마를 동복과 하복으로 맞추어 계절 별로 입었지만 난 동복 치마를 일 년 열두 달 입고 다녔다. 여름에 교련 시간에 운동장에서 바람이 불면 친구들의 치마는 바람에 살랑거렸지만 내 치마는 묵직하니, 제 자리서 꿋꿋하게 나를 지켰다.
고3으로 올라갈 무렵이었다. 육성회비 이야기를 부모님께 말했어야 했다. 언젠가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는 체를 하지 않으셨는지 집에 돈이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봄 방학이 끝나고 3월 2일이 되어 학교에 가니 반 편성에 내가 빠져 있었다. 어느 학급에 배정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망연자실이란 바로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부모님께 자초지종 말씀을 드리자 당장 돈을 구해오셨다. 간신히 반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번호가 끝 번인 63번이 되었다. 번호는 키순이었는데, 반 편성이 끝나고 나중에 들어와서 키와는 관계가 없이 맨 끝 번호인 63번이 된 것이다. 아마 키순이면 50번 대가 맞을 것이다. 일 년 내내 63번으로 살아야 했다. 앨범도 번호순이어서 맨 끝에 내 사진이 실렸다. 고등학교 앨범에 실린 내 사진을 보는 일은 상처가 난 손가락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였다. 그때의 내 상황이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그 이후로 ‘63번’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는 장학금으로 대학에 다니던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스스로 학비를 댈 능력이 있으면 가라고 하셨다. 동생들의 중고등학교 학비도 아버지의 교사 봉급으로는 매우 벅찼었다. 집안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원하는 대학에 지원하지 않고, 장학금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대학을 골라 시험을 보았다. 수석 입학은 아니지만 입학할 때 약간의 장학금을 받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비를 보탰다. 신입생 때는 교내 영자 신문사 기자로 활동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계속 장학금을 받고자 했으나 그런 마음이 오래가지 못했다.
가게에서 생필품을 사면 장부에 달아 놓다가 아버지 월급날 갚곤 했었다. 하루는 소주를 한 병 외상으로 달아 놓고는, 여느 때처럼 한강을 바라보며 아침부터 소주병으로 나팔을 불어 마셨다. 가야 할 학교에 가질 않았다. 한강에 종일 앉아 있거나, 거리를 무작정 쏘다니다 지쳐 집에 돌아왔다. 세상살이가 하찮아 보였고, 뭐가 중요한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일까? 모범생의 모습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장부에 적혀있는 ‘소주’를 보셨다. 죽을 각오로 야단맞을 준비를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버진 아무 말씀이 없었다. 조용히 왜 그랬는지 물으셨다.
“학교에 다니기 싫어요. 고등학교 친구들은 모두 서울대나 연고대 다니는데, 코딱지만 한 학교에 적응이 되질 않아요.”
그날 난 기침이 심했고 감기 기운이 있었다. 약국에서 000과 알약을 사서 내게 주셨다. 울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동생들 몰래 연극 표 두 장을 주셨다.
63번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내가 또 다른 일로 가슴앓이를 할 줄 몰랐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학교 영자 신문사 일로 편집비까지 받아서, 그 돈으로 내가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또 다른 아픔이 생긴 것이다. 소위 sky가 아닌 학교에 다니는 것이 내 인생의 큰 오점인 것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신촌 바닥을 혐오했다. 남들은 왜 그런지 의아해했지만, 나는 죽을 만큼 아팠었다. 땅만 보고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질 않고 거리를 쏘다녔다. 내 인생이 다른 사람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도 않는 출석번호와 출신학교가 대체 무엇인가 싶었다.
‘난 너무 무능하고, 날개도 없어. 난 날 수 없어!’
잠재의식 속에 달고 다녔던 이 부정적인 주문. 사실 난 누구보다도 높이 날고 싶었던 거다. 동화 속의 ‘애벌레’처럼 멋진 나비가 되고 싶었기에 이리도 아팠던 거다. 기다려야지. 나비의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날개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살을 찢는 고통쯤은 견뎌야 한다. ‘애벌레’가 잠시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해서 하루하루 금쪽같은 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바닷가의 몽돌이 되려면 수많은 파도와 수없이 부딪혀야 한다. 나는 딛고 일어섰다. 교수님께 못 본 시험은 재시험을 보겠다고 했고, 학교 근처 다방을 어슬렁거리지 않고 곧바로 강의실로 갔다.
졸업 한 달 전에 무역회사에 취직했고 일 년 반 뒤에 교사가 되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교직의 본분을 다했다.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자비로 유럽 여행을 한 달간 다녀오기도 했다. 유럽은 장애인의 천국이었고, 남을 배려하는 사회였다. 수많은 장애인이 휠체어를 끌고 루브르 박물관을 관광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에펠 탑을 관광하며 화장실에서 고등학생인 듯한 소녀를 만났다. 우리나라를 아는지 물었다.
“남한에서 왔어요? 북한에서 왔어요?”
“남한에서 이곳으로 입양 온 친구들이 많아요. 고아 수출국입니까?”
너무나 실망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둔 시절이어서 그와 관련된 답변을 기대했었다. 하기야 처음 영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도 팔뚝에 입양아임을 증명하는, 종이 팔찌를 찬 어린 아기가 많았다. 심지어 쌍둥이까지 있었다. 이 아기들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할 날이 있을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 하나의 상처 입은 ‘애벌레’가 생기면 어쩌지?
담임교사 시절,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최대한 사랑과 관심을 쏟았다. 연극과 노래를 지도하거나, 팝송을 따라 부르게 하면서 아이들과 숨통 트일 구멍을 함께 찾았다. 교장이 되어서도 상담센터와 연계하여 학부모 프로그램을 신청하였다. 대학 시절, 방황하다가 그나마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요즘은 생물학적인 부모지만, 진정한 학부모로서 자격이 없는 부모가 많다. 그래서 더더욱 학부모 프로그램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교문 앞에서 아이들의 등굣길에 이름을 불러주고 먼저 인사를 했다. 입학식이나, 조회 시간에는 방송의 화면을 통해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어주었다. 때로는 성대모사를 하느라 연습을 많이 했다. 그 덕에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나를 대했다.
“어? 오늘 텔레비전에 나왔지요? 그 책 읽어주신 분 맞지요?”
라며 인기스타라도 만난 것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때로는 진지한 질문도 서슴지 않고 던졌다.
“교장 선생님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난 기자가 되거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
“아! 그럼 하나는 이루었네요.”
“네 꿈은 뭐니?”
“제 꿈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는 거예요.”
“오! 그래? 꼭 그 꿈이 이루어질 거야!”
하며 하이 화이브를 했다.
분노 조절 장애 아이들과도 친해졌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학년 초에는 교실 전체를 돌면서 자살 증후군 학생이 진급한 학년의 유리창도 살폈다. 그 학생이 있는 교실의 창문에 즉각 유리 창살을 하나 더 만들어 넣었다. 또 다른 ‘애벌레’의 꿈이 좌절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학교는 비가 오면 비상이었다. K는 배고프다고 소리 지르고 급식에 싫어하는 반찬이 나와도 소리를 질렀다. 영어 게임에 져도, 시험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도 소리를 계속 질러, 그 반은 물론 다른 반까지 수업에 방해되었다. 학부모 단체 민원이 몇 년 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특수학교 대상도 되질 않았다. 여학생이라 여교감이 교실서 안고 내려오면
"교장 나와! 교감을 이따위로 가르쳐?"
라고 소리쳐서 불려(?) 나간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날엔 자기처럼 분노 조절이 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상담심리사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똑똑히 자기 의사를 표현하며 가끔 교장실에 놀러 오기도 했다. 또 하나의 아픈 ‘애벌레’인 K! 그녀는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도 그 아이를 감당하질 못해 조부모와 살았다. K 때문에 해당 학년의 담임이 되길 모두 극도로 싫어했고, 담임했던 교사는 병을 얻기도 했고, 어떤 이는 명퇴했다. 제비뽑기로 그녀 담임이 된 선생님이, 코로나로 출석을 별로 하질 않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며 쓴웃음을 지었었다. 지금도 비만 오면 K가 생각난다. 상담 치료도 계속 받았었는데, 친구들과는 잘 지내는지 적응을 잘하고 있는지 보고 싶고 궁금하다.
예전에 방황했던 시절의 거리, 종로를 가끔 가본다. 재수생이 들끓었던 뒷골목의 술집이 있었던 곳도 가보고 첫 미팅 장소인 종로서적 뒤의 예그린 찻집이 있었던 곳도 둘러본다. 지금은 모두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멀리 돌아왔지만, 그때 마음을 다잡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따져보면 삶의 경험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이성적인 일입니다.
당신은 광활한 허공 속을 돌고 있는
한 행성 위에 앉아 있습니다.
현실을 잘 들여다보세요.
당신은 영원 속을 명멸하는
우주의 빈 공간 속을 떠다니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곳에 머물러야만 한다면
최소한 행복하게 그 경험을 즐기는 편이 낫습니다."
마이클 싱어의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서 나온 글이다. ‘애벌레’ 일 때 상처받았고, 힘들었다고 징징대지 말자. 그 경험도 행복하게 즐기는 편이 낫다고 하지 않은가? ‘새로고침’을 하자. 그간의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멀리 돌았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비가 되어 화려한 날개를 펼치면,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할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