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에 없는 그녀

우리 다시 만나면, 나를 용서할 수 있겠니?

by 박찬미

내가 M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여름날 35번 버스 안에서다. 등굣길의 버스에서 그녀의 눈길을 강하게 느꼈다. 교회에서 안면이 있었지만, 그때까지 별로 대화가 없었고, 그날도 역시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M은 교복을 입은 나를, 커다란 눈망울로 뚫어지게 자세히 쳐다봤었다. 뒤통수 따갑게 꽂히는 시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별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 뒤로 어찌어찌하다 보니 교회에서 서로 친해졌다. M은 사교성이 좋아 아무에게나 말을 스스럼없이 붙였지만 난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늘 누군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야 마지못해 대답하곤 했다.


M은 밖에서 보기엔 외향적이고, 돈 많은 무남독녀였지만, 실상은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원래 형제들이 많았는데 그 형제들은 아버지와 살고, 그녀만 따로 어머니와 살게 된 거다. 어머니는 가이드 일을 했는데,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우고 일본을 드나들었다. 실제로 뵈니 미인이고, 딸보다 훨씬 날씬하면서 화려해 보였다. 서부이촌동에 살 때, 우리도 부모님이 음식점을 하셔서 따로 떨어져 살다 보니, 자매만 있는 우리 집에서 그녀는 자주 와서 자고 갔다. 방학이면 동네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자연스럽게 우리 집으로 왔다. 동생들과 서로 게임도 하고, 즐겁게 지냈다. 코미디언처럼 웃기는 소리를 잘하고 성대모사도 잘하는 M을 동생들은 나보다 더 좋아했다.


언젠가 M이 우리 집에 있을 때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나와 동생들은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걱정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루는 새아빠라는 분이 찾아왔다. 너무 집을 많이 비운다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지금도 중후하고 세련된 그분의 모습이 생각난다. 또 한 번 놀란 일이 있다. M은 그 당시에 중산층 아파트에 살았는데 새아빠와의 불화로 살던 아파트의 방에 불을 내고 우리 집으로 피신을 왔다고 했다. 다행히 불길이 잡혀서 큰 화재는 아니었지만, 그 일로 어머니와 새아빠가 헤어졌다고 들었다.

대학에 들어간 첫 방학 때는 들뜬 기분으로,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부모님께는 친구와 캠핑 간다고 하고, 캠핑 하루 전에 M의 집에 간 것이다. 서로 좋아하는 남학생 이야기도 하면서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춘천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각자 가방 하나씩 챙겨 청량리역에서 만났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경춘선을 탔다. 장난기가 많은 그녀는 기차 문이 열리면 바깥으로 나갔다가 닫히기 일보 직전에 기차에 들어왔다. 나는 간이 떨린다고 제발 그런 장난을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도무지 멈추질 않고 추운 겨울바람을 기차 안으로 들이밀었다. 아슬아슬한 장난을 몇 번 치다 보니, 춘천에 도착했다. 커다랗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옷 가방을 들고 춘천역에서 택시를 탔다. 시내 여관을 가자니까 운전기사가

“너희들 집 나왔지?”

우리의 옷 가방을 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녜요. 여행하려고 왔어요.”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여관에 내리자마자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잠을 청했다.


우리는 청평사로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에티오피아’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저녁이면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그렇게 사흘을 저녁이면 진탕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숙소에서 잠을 잤다. 집에서 해방된 기분을 맘껏 누린 시간이었다. 다음날 M이 갑자기 부산에 가자고 했다. 엉겁결에 따라나섰다. 기차에서 내려 해운대의 00장이란 곳을 찾았다. 그녀의 친구가 이곳에서 카지노 딜러를 한다고 했다. 돈 많은 이촌동 부잣집에 사는 친구가 가출해서 이곳에 딜러로 일한다고 했다. 무슨 사연일까?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물어물어 간신히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귀티가 나는 하얀 얼굴에 단발머리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화려한 금귀걸이를 하고, 노란 티셔츠에 검정 주름치마와 검정 코트를 입었는데, 미모가 뛰어났다. 그녀는 서면의 규모가 꽤 큰 나이트클럽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의 매니저가 자신에게 푹 빠져있다고 하였다. 그 매니저가 융숭한 대접을 해서 안주를 풍성하게 잘 먹었다. 그 남자는 무대에서 나도 잘 모르는 팝송을, 멋을 잔뜩 낸 목소리로 목청껏 불렀었다. 다음 날 아침 M과 함께 부산 여관 옆 대중목욕탕에 갔다. 오래된 목욕탕에 손님은 우리 둘뿐이었다. 서로 등을 밀어주고는 내 짐을 꾸려 바로 헤어졌다. 여행경비가 바닥이 나서 나는 먼저 서울행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게 되었다.


대학 2학년, 인생의 최대 고비를 맞았다.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혼돈이 왔다. 게다가 장학금을 받으려 입학한 대학이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는 내가 걱정되어선지, 아래층에는 음식점을 하고, 윗 층에는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래도 나의 방황은 멈추질 않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싫어 나는 늦도록 거리를 쏘다녔다.


어느 날 종로 뒷골목의 싸구려 소줏집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술도 마시고, 춤도 추는 곳이었다. 값싼 나이트클럽이라고 해야 할까? 맥주 대신 소주를 마시며 조그만 무대에서 춤을 추는 곳이었다. M이 만나자고 해서 그곳으로 데려갔다. 그 후로 그곳은 나보다는 M의 단골이 되었다. 그 겨울에 우리는 만나면 다방에 가서 DJ에게 음악을 신청했다. 나는 주로 레너드 코헨의 ‘Nancy’를 들으며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하기 싫다며 삶을 저주했다. 그 소줏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한 번은 술에 취해 거리를 쏘다니다가 통행금지에 걸린 적도 있었다. 바로 집 근처 파출소로 갔는데, 닭장차를 타기 전에 집에 전화를 걸어 신분 확인 후 귀가했었다. 부모님께 무지하게 야단을 맞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즈음 M의 어머니는, M과 함께 일본으로 가려했다. 일본에서 M의 선 자리도 마련했다고 들었다. 마침 M이 사귀는 남자 친구도 있었는데, 그녀는 죽어도 일본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긴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 나는 정신을 차렸다. 더 이상의 방황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M은 자주 공중전화로 나를 불러냈다. 게다가 술이 잔뜩 취해서는 횡설수설했다. 처음 몇 번은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주로 일본에 가기 싫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곤 죽고 싶다고 했다.

“우리 이다음에 결혼하면, 아파트 위층과 아래층에서 살자. 된장, 고추장이 필요하면 서로 나눠 먹고.”

헤어질 무렵 M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에 M이 자주 술에 취해 전화했다고 동생들이 걱정했다. 동생들에게도 전화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니, 나는 짜증이 났다.

“그냥 죽으라고 해! 그럴 용기로 살면 되지!”

“내가 집에 있어도, M의 전화가 오면 나 바꾸지 마!”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부터 교내 영자 신문사의 편집장 일을 맡아 분주했었다. 어느 날 학교를 다녀와 집에 오니 엄마가 뉴스에 M이 나왔다고, 이촌동 아파트 고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었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믿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형사란 사람에게 전화가 왔었다. M이 나에게 유서를 썼다고 한다. 1978년 3월 2일 내 친구 M은 용산의 철도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발인하는 날부터 삼 일간 종일 비가 세차게 왔었다. 얼마나 한이 많았으면 죽어서도 몇 날 며칠을 눈물을 뿌릴까?

그 후로 같은 교회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M의 소식을 들었다며, 늘 암울한 모습을 하고 다녔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질타했다. 진짜로 죽을 사람은 너라는 잔인한 말을 들었다. 나는 그래도 쌌다. 몇 날 며칠을 얼이 빠져 지냈다.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고,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 미웠다. 난 이기적인 동물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도 아닌 괴물!


겉으론 멀쩡했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한 나날이었다.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였다. 꿈을 자주 꾸었다. 꿈에서 M은 살아있었다.

“미안해. 먼 곳으로 이사 갔었어.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네.”

M은 낯선 얼굴로, 나에게 변명했다. 낯선 동네, 낯선 집에서 함께 한참을 걸어 나오는 꿈! 그런 꿈을 하도 자주 꾸어서 어느 때는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M의 생일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월 칠석이다. 음력 칠월 칠석이면 난 가슴앓이를 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음으로 몬 죄책감으로 마음이 아팠다. 언젠가 딸이

“엄마는 친한 친구가 없나? 늘 학교 일만 하고 살고 집에만 있잖아?”

하길래 엉겁결에

“나도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M과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남긴 물건도 없다. 그녀를 기억할 방법이 하나도 없는데, 그녀와의 일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우습지도 않은 일에 우리는 깔깔거리며 거리를 쏘다녔다. 돈이 없을 때는 50원짜리 ‘티나’ 크래커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아침부터 <닥터 지바고>를 대한극장에서 같이 보았고, 짜장면을 같이 먹었었고, ‘장밋빛 스카프’를 음악다방에서 같이 들었었다. 그녀가 능청맞게 불렀던 ‘불 꺼진 창’이란 노래도 생각난다.

“시방 나는 보았네. 왜냐고 묻덜 말랑게 ”

배 타고 내린 청평사는 햇살이 따사로운 겨울이었다. 강가 살얼음 사이로 살짝 비치던 하얀 몽돌, 햇볕에 유난히 반짝이던 잔물결도 잊을 수 없는데, 그녀는 내 사진첩에 없다. 마치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이터널 선샤인’이란 영화에서 하워드 박사가 모든 기억을 지우는 것처럼 나도 M과의 모든 기억을 지우개처럼 지우고 싶었다. 아니 타임머신을 타고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평탄한 20대를 시작하고 싶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싶었다.


가시투성이로 보이는 껍질 속에 성장의 열매가 있었나? 상처가 곪아 터지고, 다시 상처가 되어 딱지가 생기며 새살이 돋듯이, 서서히 나는 과거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M이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누리지 못했던 삶을 내가 대신 살아준다는 그런 느낌? 나를 좋은 쪽으로 강하게 이끌어준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플 때 강하게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내가 마음이 아플 때, 털고 일어설 힘을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크고 똥그란 눈망울로 나를 사랑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M은 늘 진정으로 내가 행복하길 바랐었다.

‘그래! 친구야, 미안하고 또 고맙다. 그땐 내가 너무나 철이 없었어.’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M이 그립다. 내가 무지개를 건너 만나면 우리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녀가 용서하고, 나를 받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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