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자매들과의 여행은 태풍으로 무산되고, 결국 남편과 속초에 가게 되었다. 저녁 무렵 리조트 객실 안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들려오고 사뭇 주위는 고요하다. 외옹치항에 레몬 빛 가스등이 막 켜지기 시작하고 운무가 뿌옇게 하늘을 감싼다. 아 아! 이 시간이 몸서리치게 좋다. 안개와 가스등을 사랑한 전혜린!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도 장녀로서 부모가 거는 기대가 많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이 내게 동생들을 맡겼어. 그땐 힘든 줄 몰랐지만,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때처럼 못 할 거야.”
혼잣말처럼 남편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음식점을 내면서 아버지도 퇴근하면, 그 일을 돕느라 우리 자매와 떨어져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일하는 도우미 아주머니들은 딸 다섯의 성화에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자의 반, 타의 반 내가 살림을 맡아, 새벽이면 도시락 다섯 개를 싸야 했다. 갑상선 항진증까지 왔지만 잘 버텨냈었다. 그 시절 생각나는 사람!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은 바로 안개가 잔뜩 낀, 가스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한강 근처였다. 밀려오는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물거품이 생긴다. 나의 짝사랑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짝사랑이 끝나기 전까진 단단한 거품 속에 있었다.
그는 성악을 공부하던 대학생이었다. 교회 성가대 지휘자이기도 해서 일요일이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새로 다닌 교회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중고등부 음악회 준비로 성가대 연습이 잦았다. 게다가 내가 솔로를 맡게 되어 평일 저녁에도 열심히 연습했다. “Swing low, sweet chariot”, “보리밭”, “별” 등 장르를 뛰어넘는 노래였다. 음악회에서 불렀던 노래를 아직도 기억한다. 교회에서 돌아오면 나의 솔로 파트를 열심히 연습했다. 오로지 그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였다. 나는 그의 낮은 베이스 목소리에 반하고, 그의 선한 눈동자에 끌렸다. 외향적인 나의 친구는 같은 성을 가진 그와 곧잘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나는 그 옆에서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다만 성가대 지휘할 때만큼은 실컷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남의 이목을 끌만큼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듬직한 외모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였고, 늘 털털한 셔츠 바람이었다. 지휘하려고 팔을 들면 셔츠의 겨드랑이 부분이 터져있었다. 그다음 해에도 설마 꿰매 입었으려니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말도 명료하게 하지 않고, 어떤 순간에는 약간 더듬기도 했다. 너무 완벽한 사람보다 조금 부족한 듯 보이는 게 내겐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가 성가를 부르거나 노래를 부르면 완벽하게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좌중을 사로잡았다. 늘 유머로 좌중을 웃겼고, 교회 성가대 일을 성실히 하는 청년이었다. 그와는 11살 차이였다. 늘 셈을 하며 그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혼자 곱씹었었다.
그 시절 동전만 생기만 공중전화박스로 갔다. 무슨 용기가 생겼을까?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로 그의 어머니가 받았다. 그의 목소리가 아니면 끊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에 상대방 번호가 뜨면 생각도 하지 못할 행동이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집에 가는 길이 세상 즐거웠다. 어느 날은 그가 전화를 받았다. 늦은 밤이었지만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둘이 만나서 을지로 계림 극장 맞은편의 제과점에 들어갔다. 우유 한 병을 시켜 나누어 먹었는데, 요금이 500원이었다. 그는 계산하려고 상의와 하의에 있는 온갖 주머니를 다 뒤졌다. 내가 돈이 있었으면 냈을 것이다. 왜 하필 돈 한 푼 없이 나온 날 그를 만나게 되었는지 저주하는 순간이었다. 주머니를 뒤지는 시간이 스무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가 500원을 찾아 계산했다. 궁핍한 대학생인 그가 새삼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장충동 우리 집까지 걸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주택가의 으슥한 골목에 여관 간판이 많이 보이자 그는 내게
“이 동네, 왜 이리 야하냐?”
라고 말했다.
‘여행자들이 노곤한 몸을 누이는 곳인데, 왜 야하다고 할까?’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 의미를 알게 된 건 몇 년 후였다.
고3 성탄절 이브에 시화 액자를 만들어 그에게 전해주었다. 문구점에서 유리 액자와 예쁜 색 한지를 샀다. 나는 손재주가 없어 그림 그리는 것도 서툴고 또 무엇을 만드는 거 또한 젬병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써서 그림까지 그려 액자를 만들었다. 시화를 만든 일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뜬 마음으로 그의 집에 액자를 전해주었다. 그날 처음으로 ‘새벽 송’이란 걸 돌았다. 성탄절 전야부터 새벽까지 교우들 집을 돌면서 성탄절 노래를 불러주는 성가대 행사다. 교우 집 대문 앞에서 그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지휘하면 모두가 화음을 넣어 성가를 불렀다. 불 꺼진 집 유리창에, 하나씩 불이 들어오고, 집 안에 있던 교우가 나와서 간식을 한 보따리 주곤 했다. 한겨울에 달랑 교복 차림이었고 외투도 입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다니니 춥지 않았다. 물론 중고등부 성가대 무리와 함께였다. 하얀 눈이 쌓인 거리를 몇 시간을 돌았다. 밤새워 걸어도 지치지 않았던, 그 골목골목과 가로등이 생각난다. 고3 대학입시를 바로 코앞에 둔 시점에 그러한 일탈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대학에 입학하고 봄 축제가 있었다. 그를 초대했다. 촌스럽게도 축제 때 한복을 입는 여자대학의 전통이 있어 분홍색 한복을 입고 그와 캠퍼스를 활보했다. 그리고 더 촌스럽게, 학교에서 주는 축제 기념품인 찹쌀떡을 그의 품에 안겼다. 딱 한 시간 반 동안이었지만 행복했다. 바쁘게 대학 생활에 적응하면서 차츰 그를 잊었다. 아니 새 남자 친구가 생겼다. 처음으로 나를 좋다고 해주는 남자가 생긴 것이다. 그 남자 친구와도 어찌하다 보니 그럭저럭 헤어지게 되었다.
어스름한 저녁, 가스등이 하나씩 둘씩 켜지고 한강에 안개가 자욱한 날 저녁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외로운 맘이 들어 한강 주변을 산책하던 중,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맨 그를 만났다. 성가대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회식이 있었다고 했다. 약간 술 냄새가 풍겨왔다. S 중 교사로 있다고 했다. 기분이 좋았는지 횡설수설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자세히 보니 몸집도 예전보다 좀 살이 오른 모습이었다. 원효로에서 이촌동까지 안개가 자욱한 한강 주변을 함께 걸었다. 그게 그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결혼하고 딸이 중학교에 다닐 무렵, 그가 텔레비전에 출연한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여전히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약간 더듬는 듯한 말투도 그대로였다. 그는 P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독일로 유학해서, 그곳에서 만난 유학생과 결혼을 하였다는 것을,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되었다. 그와 다시 연락하게 된 것도 순전히 인터넷 덕분이다. 그 무렵은 개인정보에 둔감했던 시절이라 어렵지 않게 그의 메일 주소를 확보했다. 공중전화를 걸 때처럼 무모하게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나는 현재 교직에 있고, 결혼하여 딸도 하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을 기억하냐며, 생뚱맞게 다른 지인들의 안부도 전했다. 며칠 후 그에게 답장이 왔다.
“내가 원래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해서도 그렇지만 지난번에 신경을 써서 메일을 보냈는데 메일이 가질 않아서 얼마나 실망이 됐는지 몰라. 지금은 컴퓨터 몸체를 좀 나은 걸로 조교가 바꿨는데 될지 모르겠어. 우선 보내볼게. 다행히 되면 빨리 연락해 알았지?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고 그래. 엄마가 됐네. 하하하.”
그가 보낸 메일이 맞았다. 맞춤법, 띄어쓰기도 엉망에다가 인터넷에 서툰 것까지도 딱 그가 맞았다. 메일을 작성하면서 허둥거렸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엄마가 된 내가 너무 신기했나 보다. 갈래 머리 고등학생으로 늘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을까? 그의 메일에 답장하지 않았다. 그때 왜 답장을 곧바로 하지 않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부질없다는 생각이었을까? 메일을 받은 게 20년 전이지만 차일피일 바쁘게 세월이 흘러갔다.
이 밤 하나씩 차례로 켜지는 가로등과 뿌연 운무를 보니 생각난 사람이다. 나 같으면 나이도 어린 학생이 밤낮으로 전화하니 성가시다고 피할 만도 한데, 용케도 잘 참아주었다. 참 고마운 사람! 고등학생인 나에게 마음에 상처를 입힐까 봐 조심조심 나를 지켜봐 주고,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와 입시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맏딸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에 힘겨웠을 시절에, 짝사랑의 단단한 거품 속에서 그 시절을 씩씩하게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 거다. 그 거품은 오로지 나와 그 사람을 위한 보호막이었다. 비록 그 짝사랑이 유효기간을 넘겨 물거품이 되었을지라도. 오늘 그에게 메일을 보낼까? 힘들었던 시절 단단한 거품 속에서 날 지켜주어서 고마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