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코스프레

역시 엄마는 엄마다

by 박찬미

얼마 전 빵집에서 빵을 먹고 있는데, 젊은 여성 둘이 나누는 대화가 우연히 내 귀에 들렸다.

“지네들끼리 클 테니, 아이를 더 낳아도 된다고?”

“나는 그 말이 제일 싫어. 왜 맏이인 내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해?”

“동생들을 키워 봤냐고? 내가 부모 대신해서 그 고생을,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얼마나 한 줄 아냐고? 다른 사람들은 그 심정을 몰라.”

아주 예전의 일 같은데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매우 높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듣고 있는 이도 공감하는 눈치였다. 짐작하건대 결혼도 하고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들의 대화였다. 너무나 공감이 가는 이야기여서 하마터면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면서 돌아본다. 나는 과연 동생들의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긴 한 걸까?

막냇동생은 나랑 9살 차이이다. 그녀가 태어날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때까지 우리 자매는 딸만 내리 넷이어서, 부모님은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엄마가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돌아왔는데, 표정이 어두웠다. 누군가 엄마가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동네 사람에게 엄마가 아들을 낳았다고 푼수처럼 자랑하고 다녔다. 어느 날 아기방에 들어간 나는 깜짝 놀랐다. 남자아이가 아니었던 거다. 그래도 아버지는 늦게 가진 막내딸을 무척 사랑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막내를 안고, 업고, 즐거워했다. 막내는 커가면서 자연히 내 차지가 되었다. 같은 꿈을 계속 꾸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막내를 업고 뛰는데, 발이 꼼짝을 하지 않아 숨이 막힐 듯하다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부엌 찬장에 곰팡이가 생겼다. 곰팡이가 생긴 반찬 그릇이 늘어났다. 요즘엔 냉장고가 있어서 곰팡이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냉장고가 없던 시절엔 며칠만 반찬을 그대로 두어도 곰팡이가 생기곤 했다. 여름이면 엄마는 애호박을 쫑쫑 반듯하게 썰어 넣은 손칼국수를 식구들에게 곧잘 해주었고, 겨울에는 흑설탕이 들어간 찐빵을 간식으로 만들어주었었다. 그러나 그즈음엔 칼국수나 찐빵 대신 간식으로 사서 먹으라며 내게 용돈을 얼마 주어서, 그것으로 크림빵이나 보름달 빵을 사서 동생들과 나누어 먹었다. 언젠가는 상한 고등어를 먹어 식중독에 걸렸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누울 수 없을 정도로 두드러기가 심했고, 아팠다. 엄마가 외출하는 날은 향수 냄새로 먼저 알아차렸다. 엄마는 그런 날이면 나에게 돌이 갓 지난 막냇동생을 잘 보라고 했다.

상도동 시장 정류장 앞에서 동생을 포대기에 업고 나가서 엄마를 기다렸다. 매서운 겨울 밤바람이 차가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번 버스에는 오겠지, 다음 버스에는 오겠지 하며 기다렸다. 외출한 엄마는 12시 직전에 오곤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엄마를 한없이 원망했다. 이 어린 동생을 내게 맡기고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 오는 걸까? 향수 냄새를 풍기며 늦은 밤에 돌아온 엄마는 어김없이 아버지와 대판 싸웠다. 자다 깬 동생들과 울면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정신이 멍했다. 왜 어른들은 싸우는 걸까? 왜 엄마는 아버지가 그렇게 싫어하는 외출을 해서 밤늦게 오는 걸까? 다른 친구들의 부모도 그렇게 싸움할까?


아버지는 실력 있는 교사로 6학년 담임만 맡았었고, 퇴근하면 아이들을 과외로 가르쳤다. 수입이 많아져서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살았다. 상도동에 백 평이 넘는 넓은 집도 마련했다. 문제는 여태까지 그렇게 많은 돈을 만져보지 못한 엄마가 살림 외에 돈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돈을 벌어 강남에 땅을 산 선생님은, 지금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열여덟 살 여고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엄마는 물질적 여유가 생기자, 다른 세계가 무척이나 궁금했나 보다. 무슨 동창회가 그렇게 많은지, 계 모임도 그렇고, 친구들과의 모임이 잦아졌다. 그때 얼마나 질렸는지 지금도 우리 자매는 동창회라면 질색하고, 그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머피의 법칙인지 엄마가 외출해서 늦게 오는 날이면, 아버지가 일찍 집에 귀가했고,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면 아버지가 늦게 왔다. 엄마가 곱게 화장하고, 향수를 뿌리며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생을 돌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또 밤새 이어질 부부싸움 때문이었다.

엄마의 화려한 외출이 오래가진 못했다. 중학교 입시가 없어지면서 과외도 없어지니 당연히 가계수입이 줄어든 거다. 딸 다섯을 부양하려니 아버지의 교사 봉급으론 늘 벅찼다. 지금과 달리 중고등학교 모두 육성회비를 내야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엄마가 음식점을 차리게 되었다. 아버지도 음식점 일을 도와야 해서 우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딸 다섯이 있어도 집안일은 거의 내 차지였다. 둘째는 몸이 약했고, 내 생각에 셋째와 넷째는 아직 어려 보였다. 도시락 반찬을 만드는 일이 힘들었지만, 그것도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동생들은 내가 해준 오이무침이나 감자볶음 등 도시락 반찬을 기억한다. 가끔 설거지하는 것을 두고 서로 미루고 싸움했지만, 밖에서 누구 하나라도 싸움이 나면 우리 자매는 똘똘 뭉쳐 다른 이들과 맞서 싸웠다. 내가 힘들 땐 오히려 동생들이 나를 격려해줄 때가 있었다. 알람시계가 없던 시절이라 내가 늦잠이라도 자면, 모두 지각이라 늘 긴장해선지 갑상선 항진증이란 병이 생겼다.

고3 수험생인 나를 배려해서 엄마가 하는 음식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대학에 들어가 나의 방황이 시작되자, 아버지는 아래층에는 음식점을 하고, 이 층에는 살림집인 곳으로 또 이사했다. 음식점도 사업인지라, 오르막 내리막이 있어서 상권이 좋은 곳을 골라 이사해야 했다. 막내가 초등학교 전학을 자주 가는데, 대학생인 내가 학부모 노릇을 했다. 또 막내의 고3 때는, 내가 교직에 있을 때였는데, 담임선생님과 두어 번 만나서 진학 상담을 했다. 대입 시험을 칠 때도, 김밥을 싸서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막내와 같이 점심을 먹기도 했다. 막내가 결혼하면 부모 노릇이 끝나는 줄 알았다. 막내는 엄마보다는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선지, 간혹 부부싸움을 할 때도 내게 전화해서 중재해달라는 둥, 자식과의 사소한 다툼에도 나의 개입을 원했다. 지금도 엄마는 막내가 제멋대로라고 가끔 나한테 푸념을 한다. 막내라 버릇이 없다고 하면, 난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막내가 불쌍하지 않냐며, 늘 엄마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얼마 전 동생들과 만나기로 한 날, 막내가 아침에 갑자기 전화해서는 약속이 있다며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나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성격이라 그 전날 막내에게 줄 선물과 조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현금이 든 봉투도 가방에 넣어 두었었다. 하루 전날 확인 문자를 했을 때도 별말이 없다가 갑자기 취소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둘째와 함께 이번에는 조카 생일 축하금을 보내지 말자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일침을 가하자면서 의기양양하게 합의를 보았다. 미안했던지 다음 날 막내가 전화했다. 화가 난 심정을 속이지 못하는 성격에, 사전에 약속을 취소하지 그랬냐 하면서 툴툴거렸다. 그날 밤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장애아들을 둔 막내는 공황장애가 있다. 겉으론 멀쩡한 20대 청년인데, 지능이 조금 떨어져서 집에만 있고, 그 아들이 혼자 있으면 집에 있는 반려견들을 괴롭힌다. 사업이 잘되어 돈은 풍족하게 있지만, 늘 그 아들로 인해 신경이 예민하다. 어떤 날은 너무나 우울해서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도 했다. 개천절은 그 아들의 생일이기도 하다. 그 아들의 생일을 유난히 살뜰하게 챙기는 막내가 늘 안쓰러웠다. 3일 아침, 마침 가을비가 부슬부슬 왔다. 어두컴컴한 날씨에, 우두커니 집에 있을 동생이 걱정되었다. 비로 인해서 마음이 우울해지진 않을지, 언니의 까칠한 전화에 더 마음이 외롭진 않을지 이런저런 생각에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막내에게 입금하고, 조카의 생일 축하 문자를 넣었다. 막내의 고맙다는 문자 하나에 내 마음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어린 시절, 갑자기 닥친 초경에 당황한 날, 먹먹한 심정이었다. 내 딸의 초경 때는 어른이 되었다고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그날은 너무나 외로운 날이었기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다소 과장된 파티를 열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우리 자매는 어른이 되었으니 축하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속 옷도 누가 매일 정갈하게 갈아입으라 챙겨 준 적도 없었다. 그 일은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언니보다는 아픈 상처를 보면 ‘호오, 호오’하며 따뜻한 입김으로 불어 줄, 어른이 필요했다.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줄 든든한 어른의 손길이 더 그리웠다. 아니다! 사실은 엄마의 든든한 손길과 따뜻한 입김이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그리웠고 필요했다. 연년생 자매들의 사춘기 때부터, 엄마의 부재는 우리 자매에겐 잔잔한 슬픔이었고 상처였다. 내가 흉내를 낸 내 동생들의 엄마 노릇은, 어쭙잖고 어설프기만 했다. 누군가 내 향기가 진해서 다른 사람의 향기를 맡지 못했다고 했듯이, 나는 내 향기를 맡는 것에 급급했다. 동생들이 아파할 때, 낭떠러지에서 힘들다고 외칠 때, 정작 나의 아픔으로 동생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허수경 시인은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고 했다. 그의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서로 묶으며 고추 모 사이로 쓰러진다.’라는 시의 구절처럼, 우린 거친 바람 속에서 서로의 슬픔을 묶으며 견뎌내었다.

자매 단톡방에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올리라 했더니, 막내가

“언니, 난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남탕에 데려갔었어! 근데 남탕에서 딱 우리 반 아이를 만난 거야. 다음 날 그 애가 00 이는 남탕 다닌다고 소문을 냈어. 그 담부터 남탕에 가지 않겠다고 우긴 거 알아?”

한바탕 웃고 있는데,

“아 참! 언니 대학 다닐 때 이 층에서 일 층 내려오면서 요강 들고 내려오다 넘어져서 오줌 뒤집어썼잖아. 그때 왜 그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그래! 우린 고추밭의 고추 모 사이에서 슬픔을 서로 묶으며 견뎌내었었다. 그리고 그 슬픔은 거름으로 승화된 거 맞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으니까.

엄마 코스프레를 하면서 평생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엄마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엄마의 젊은 시절, 갓 돌 지난 막내를 내팽개치고, 초등 6학년생의 등에 업히도록 방치한 엄마에 대한 원망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 막상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딸이 늘 안타까웠다. 딸은

“늘 엄마는 자식이야 어떻든 엄마가 하고픈 일 다 하고 살았잖아.”

라고 푸념한다. 평생 거실 컴퓨터에 매달린 엄마 등만 보고 살았다고도 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난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평생 직장생활을 하면서 외국 출장을 한 달 넘게 다녀온 적도 있고, 학생들 캠프로 한 달간 집을 비운 적도 있었다. 그때가 딸의 사춘기였다. 딸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저린다. 학교 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매번 느끼는 아련함. 엄마도 엄마만의 사연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음식점을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사춘기 딸들과 떨어져 지냈을 엄마도 생각해 본다. 엄마의 노력으로 어려움 없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엄마는, 엄마의 희생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헤쳐나갔다는 말을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다. 묵묵히 그 세월을 견딘 것이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되돌아보니 엄마는 낙과(落果)였다. 정호승 시인의 낙과(落果) 중 마지막 소절,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동생들과 함께 서로 지지고 볶고 살면서 엄마 코스프레를 했지만, 땅에 떨어져 스스로 낙과가 될 만큼의 사랑과 책임이 없었다. 역시 엄마는 엄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단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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