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부부가 아닙니다.”
남편과 딸이 푸껫 여행 갔을 때, 호텔 방에 들어가니 호텔 측에서 부부로 착각해서, 붉은 장미 꽃잎으로 어마어마하게 침대에 장식하고 방까지 업그레이드해주었다고 한다. 딸이라고 이야기하고, 엑스트라 베드를 들여놓았다는 얘기를 훗날 들었다. 돈 많은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아내로 얻어 여행 다니는 줄 알았는지 남들의 쳐다보는 눈이 의미심장했단다. 둘이 파리 에펠탑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카톡 프로필의 사진으로 올리니 남편 친구가 조심스레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고도 한다.
남편이 나보다 먼저 정년퇴직을 해서, 국제선 승무원인 딸과 함께 스페인, 파리, 도쿄, 제주 등을 여행했다. 물론 비행기 요금을 할인받는 혜택을 누렸다. 보통 딸과 아빠가 함께 여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 같아도 아버지와의 여행은 생각만 해도 가고 싶은 그림은 아닌데, 그 둘은 티격태격하며 잘 다니니, 내가 보기에도 흐뭇했다. 딸 회사에서는 아버지 모시고 여행하는 효녀로 소문이 났단다.
딸과 여행 가는 계획이 잡히면 남편은 무엇을 입고 갈지 며칠 전부터 무척 고심한다. 딸이
“왜 이렇게 할아버지처럼 촌스럽게 입었어?”
라고 야단칠까 걱정해서다. 아내랑 다닐 땐 당일이 되어서야, 입을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남편이, 하지 않던 걱정을 사서 한다. 전체적인 색상의 조화도 보고, 신발까지 맞추어 미리 코디해 놓는다.
미술을 전공한 딸은 미술관이나 건축물 관람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그런 취미가 없다.
“난 여기서 쉴 테니, 구경하고 와.”
거의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남편은 숨을 고르며 쉬었으리라. 한 번은 근무하고 있는데, 딸에게서 베르사유 궁전을 나오니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둘이 길을 잃은 것을, 서울에 있는 내가 어쩌라고?’
둘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취미는 쇼핑이다. 어딜 가든 쇼핑은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다. 물건 사는 것에는 만장일치로 서로 언쟁하지 않는다. 비 오는 날 스페인에서 트렁크를 샀는데, 숙소에 들어가 열어 보니, 고가의 트렁크가 파손된 것이었다. 비도 오고, 귀찮아서 확인하지 않고 그냥 왔더니, 그 모양이었다. 다음 날 가서 이야기해도 자기네는 그런 일이 없다고 시치미를 딱 떼더란다. 할 수 없이 파손된 트렁크를 새 트렁크 가격을 주고, 국내로 와서 AS 서비스를 받았다.
필리핀 피피섬에서 배를 타고 가는데, 태풍이 무섭게 불어 배가 뒤집힐 듯 위태해 보였다고 한다. 딸은 구명조끼를 입었지만, 비를 맞아 감기 걸릴까 무서워, 남편이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고. 딸이 중학생 때 셋이 괌에 갔었다. Sling Shot이란 새총처럼 쏘는 놀이기구를 탔었는데, 정작 딸은 신이 났는데, 남편은 딸이 무서움을 탈까 봐 얼굴이 백지장 같아졌던 일이 생각났다.
아내랑 여행할 때는 음식이 터무니없이 비싼 곳은 잘 다니지 않는 남편이, 딸과 다닐 때는 고가의 음식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페인 민박집에서는 늦잠 자는 딸을 위해, 냉장고를 다 뒤져서 요리했다. 지금도 백화점을 다니면, 아내를 위한 옷보다는 딸이 입을만한 옷에 눈길을 준다.
세상 급할 게 없는 느긋한 성격이 남편과 딸, 둘이 똑같다. 서두는 법이 없다. 무슨 일이든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 것은 좋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뭐든 시작한다. 본인의 인물사진 찍는 것도 둘 다 좋아한다. 그러니 죽이 맞았을 것이다. 딸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남편이다.
난 그렇지 않다. 성격도 급하고, 딸에 대해 조금은 참아 주지만 길어지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이젠 딸과 나 이렇게 둘이서 짧은 여행을 자주 다니려고 한다. 과연 잘 다녀올 수 있을지 걱정된다. 혹시 여행 중간에 서로 싸워서 따로 비행기를 타고 오지는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