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시인의 시집 <몽실탁구장> 리뷰
만약 고궁 근처에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김수영 시인을 만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깊고 형형한 눈빛을 멀찍이서 바라만 보진 않았겠지. 용기 내 다가가 주절거리다, 소시민적 자기 폭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가까워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엔 시 클래스를 열어달라고 제안했을 것 같다.
만약 탁영대에서 갓끈을 씻고 내려오던 박인로를 마주친다면 어떨까. 두서없이 하소연하며 예나 지금이나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는 여전하다고 말했을 것 같다. 나중에 농기구를 빌리러 가도 되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제주도 우체국 앞에서 이생진 시인을 만난다면, 내게도 믹스커피 같이 한 잔 할 기회가 주어졌을까. 성산포는 둘러봤느냐고 물으시겠지. 나는 성산에서 떠오르는 일출도 이미 보았으며, 시여 시여 잘 살아라, 나보다 곱게 잘 살아라, 하신 선생님의 말씀도 기억한다고 답했으리라.
대구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인 이동훈 시인의 『몽실 탁구장』을 읽었다. 시집치고는 조금 두꺼운 책이었고, 꽉 들어찬 방대한 내용으로 보자면 얇은 책이었다. 이 시집 한 권만 읽어도, 시인들, 화가들, 예술가들이 눈앞에서 또렷해진다면 믿겠는가. 수능시험 언어영역 지문에서만 보던 옛 가사 속 인물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면 이해하겠는가. 이동훈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이윽고 알게 된다. 이런 시는 예술인의 삶과 터전과 작품 세계를 오래도록 연구해 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작품임을.
"그렇다 하더라도 탁구엔 / 이쪽저쪽을 삥 뽕 삥 뽕 넘나드는 재미가 있다. / 몸 쓰며 기분 내는 일이란 / 사람 사이 간격도 좁히는 것이어서 / 탁구장 옆 슈퍼에서 / 몽실 아주머니와 권정생 닮은 아저씨가 우유로 건배를 한다. / 아, 이 재미를 / 오줌주머니 옆에 찬 교회 종지기 권정생은 / 평생 누리지 못했겠구나." (몽실탁구장 중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집은 여름 소나기에 구멍이 숭숭 뚫려, 그 창호지 틈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었다고 한다. 허름한 집에는 생쥐가 드나들 정도였는데, 정이 많은 권정생 선생님은 아랫목에 먹을 것을 놔두고 생쥐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몽실이 머리 아주머니와 권정생 닮은 분이 등장하는 시, "몽실 탁구장"에서 짐작해 보건대, 이 시집은 강아지똥 작가, 가슴 따뜻한 권정생 선생님께 바치는 헌사 같다.
"가까이 고목 곁에 왔다면 / 나무줄기에 손바닥을 가만히 대어 봐요. / 할머니 같은 정령이 들어오지 않나요. / 어둠 사이로 내밀하게 / 찌르르 터 주는 전류에 속이 환해질 거예요. / 저기,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가는 아이 / 머잖아 엄마 손을 아주 놓치는 날에는 / 길도 잃고 고목에 한참을 기댔다 갈 거래요./ 의지가지없이 앞뒤 막막한 날 / 늙어 이파리 하나 없는 고목의 / 서늘한 곁을 쬐다 보면 / 끔쩍끔쩍, 길이 서기도 하는 것이지요."(고목과 길 중에서)
박수근의 '길'은 나무 두 그루와, 바구니를 이고 가는 어머니, 그리고 그 손을 잡고 따라가는 아이를 그린 작품이다. 어머니와 아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그 어머니의 얼굴이 내 어머니의 얼굴일 것 같고, 아이의 얼굴은 나인 것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이동훈 시인은 박수근의 "길"을 고목에 깃든 할머니 정령으로 치환하여 보다 생생한 영감을 준다. 오래된 나무는 모든 길 위에 있는 신과 같은 존재다. 어린 날의 아이와 다 커버린 아이 사이의 시공간을 바람처럼 오가는 초월적 존재다. 어쩌면 시인은 의지가지없이 막막한 어느 날, 고목에 기대어 있다가 나무의 말에 끔쩍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또렷하게 보이는 길 위에서 자신의 뿌리를 추억하는 힘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시도 탁구도 폼이다. 걱정이라면 폼 잡다가 재미 놓칠까 하는."(시인의 말)
이동훈 시인만의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입담이 느껴지는 시인의 말이다. 유머(humor)의 어원은 인간(human)이라는데, 인생이라는 예측불가능한 삶을 사는데 가장 도움 되는 기술이 바로 유머가 아닐까 싶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언어유희와 유머 넘치는 시행들 덕분에 예술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긴 역사를 응축한 작품들이 지루함 없이 읽혔다.
외투
- 이동훈
1842년* 페테르부르크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장만한 외투를 강탈당한 사내가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만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 고관의 비싼 외투를 벗기고 말았다는.
1940년 농장 자금 문제로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북만주로 떠나는 유치환을 김소운이 배웅한다.
영하의 날씨에 더 추운 곳으로 저고리 바람으로 떠나는 벗에게
눈빛으로나마 내내 외투를 입혀주면서.
1955년 겨울 초입, 아내가 중고 시장에서 사 왔다는
미제 낙타 외투를 두고 김수영은 고민이 깊다.
밖에서 벗들을 만나면
술을 아니 마실 수 없고 그럴 때면
혼자 외투를 입고 있다는 부끄러움을 어찌 견딜까 하는.
1967년 헌 옷 장사를 하던 이소선 여사가
남의 옷만 재단하는 아들을 위해 두툼한 외투를 내준다.
정작 재단사 전태일은
추위에 떨고 있는 시다에게 그 옷을 내주고
대신 소용없는 근로기준법으로 몸의 온도를 올렸다는.
2021년 벽두, 눈발 날리는 서울역
커피값을 구하는
노숙인에게 외투를 벗어주는 사내 모습이 사진**에 찍힌다.
새삼, 외투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는.
시를 읽다 보면 제목만으로도 울림을 주는 작품이 있는데 외투라는 시가 그러했다. 외투 하나로, 고골의 단편소설 "외투"에서부터 유치환, 김소운, 김수영, 이소선, 전태일, 그리고 지나가던 마음씨 착한 시민까지 하나로 묶은 내공이 대단했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장만한 외투를 강탈당한 첫 연의 등장인물은 소시민의 춥고 외로운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연에서 외투 하나 없는 김소운이 눈빛으로 유치환에게 외투를 입혀주는 장면은 애잔했다. 나머지 연에서도 추운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모두들 하나같이 본인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눈물겨웠다. 자신보다 더 추운 사람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는 '외투를 벗어주는 사내'와 같은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외투를 여러 번 읽으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좋은 음식 한 번 못 먹고, 허름한 옷을 입고 살더라도 내 것을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큰 복이 아니겠는가. 그 마음을 나눠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복이 될 것이다.
책을 읽는데 내 생각이 났다며 같은 책을 선물해주던 친구를 추억한다. 외투의 진짜 주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나도 따뜻한 외투 행렬에 동참하고자 시집을 읽고 쓰노라 말하고 싶다. 따뜻한 시만큼 좋은 외투도 없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