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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Oct 22. 2024

존엄을 향한 희망으로 나아가는 작가,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서평

스웨덴 한림원은 2024년 10월 10일(현지 시각)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름, 대한민국의 소설가 한강이 호명되었다.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소설가. 그녀의 작품에 대하여 노벨위원회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평했다. 공교롭게도 소설가 한강은 1993년 <문학과 사회>에 시로 등단한 시인이었다.


대한민국 전역이 떠들썩했던 그날, 한강은 기자회견을 마다하고 잔치를 하겠다는 아버지를 만류했다. 이후, 스웨덴 공영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한강은 “세계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조용히 있자고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마냥 즐거워할 수도 있었겠으나, 세상에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울음과 슬픔을 마음에 걸려했던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귀를 기울이고,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이 지워버린 넋의 존엄함을 기록해 온 소설가다웠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는 그녀가 낸 유일한 시집이다. 1993년에 등단 한 지 20년 만에 묶어낸 첫 시집이기도 하다. 그녀의 방 책상 서랍에 늘 존재해 왔을 '저녁'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저녁의 소묘" 중에서)"


그녀의 '저녁'은 선연한 핏자국처럼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평화조차도, 오랜 지옥조차도 '짙고 연한 음영'쯤으로 보이도록,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이기를 바란 것 같다. "회상"이라는 작품에서는 보다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라고. 그녀가 목격했고, 기억했고, 기록해 왔을 그때 그 시절의 한 장면들을 마치 심장처럼 가슴에 품고 함께 숨 쉬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에게 던진 피투성이 같은 질문을 끌어안고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떨어져 '반짝일 때까지'(저녁의 소묘 4)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질문들이 <채식주의자>(가부장제와 사회적 억압), <소년이 온다>(광주 5.18.), <작별하지 않는다>(제주 4.3./경산 코발트 광산)등의 소설로 탄생했다. 아픈 이야기와 역사적 트라우마와 함께 걷는 동안 그녀의 심장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중략)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 치는 나의 혀는"

("심장이라는 사물" 중에서)


2019년 "당신들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라는 강연에서 한강 작가는 "저는 인간에 대해서 쓰고자 하는데. 인간이 뭔지 알고 싶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간의 지점들이 있잖아요. 우리 세계 안에.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게 풀리지 않는 저의 숙제예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치던 혀는 말이 아닌 글로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더욱 또렷하게 기록하기를 택했다.  


인간이란 주제에 천착해온 한강 소설가의 작품들은 2014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세종도서 지원사업 선정 과정에서 '편중된 시각과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제외되었다. 2016년에는 문체부 압수수색 과정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한강 소설가의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2023년에는 경기도 교육청이 ‘성교육 도서’의 유해성을 문제 삼는 공문을 내려보냈고, 경기도 한 고등학교에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유해도서로 분류해 전량 폐기하기도 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의 이면에는 이러한 수난도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강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2021년 한강 작가의 북토크 현장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세상은 이렇게 고통으로 가득할까. 이런 생각도 하고 너무나 폭력이 강렬하게 느껴져서 힘들 때가 많죠. 그런데 동시에 어떻게 이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라는 것이 항상 저에게는 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었고, 평생을 그 질문의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이렇게 폭력적인 세계와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사랑과 생명의 뜨거움, 그런 것이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 그게 저한테는 굉장히 어려운 숙제처럼 계속 저를 밀고 가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중략)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새벽에 들은 노래 3" 중에서)


고통에 귀 기울이는 작업들은 한없이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희망이 모조리 사라지는 트라우마와 같은 사건들을 한 문장 한 문장 이어 쓰는 일은 힘겨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한 계절 / 더 피흘려도 좋다'는 시구로 자신의 '자기다움'과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길'을 긍정한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전문)


"밥을 먹어야지 / 나는 밥을 먹었다"를 제외하고 1연만 읽으면 무력해진다.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는 지금의 유한함과 쓸쓸함으로 가득 찬 1연에서 시가 끝났다면 염세적이었을 것이다. 한 김의 연기처럼 우리의 인생이 지나가버리고 있음만을 환기하면, 죽음이 삶을 압도한다. 그러나 한 강답게, 이 시는 "밥을 먹어야지 / 나는 밥을 먹었다"로 맺는다.


살아있으므로 우리는 손을 뻗어 밥을 먹는다. 세상에 가득한 고통이 길을 지우고, 길이 허공 속으로 날아가 버렸대도 한강은 나아간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겠다."라고 답한 그녀는 오늘도 밥을 먹고, 또 한 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존엄을 향한 희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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