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전하는 위로
어느새 바람이 꽤 쌀쌀해진 걸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SBS에서 방영중인 청춘멜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감상에 젖기 쉬운 이맘때 쯤 우리의 마음을 로맨스로 물들이기에 딱 적합한 드라마인 듯 하다. 로맨스 드라마답게 사랑이 전부인 20대 끝자락의 청춘들이 지난 사랑을 보내고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드라마에 나오는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과 아름다운 OST도 짙은 여운을 남긴다.
여주인공 채송아(박은빈 분)는 서령대 경영학과를 다니면서도 음악을 향한 사랑을 멈출수가 없어, 4수 끝에 같은 대학 음대로 입학한 늦깎이 신입생이다. 그녀는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이 위로를 줄 수 있다고 믿는 바이올리니스트지만 현실은 성적순으로 앉는 오케스트라 자리 배치표의 제일 끝자리를 담당하는 만년 꼴찌다. 바이올린과 음악을 향한 애정을 듬뿍 담아 열심히 연습하고 갈고 닦지만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 월드클래스 피아니스트 박준영(김민재 분)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그가 쏟아내는 뜨거운 음악에 비해 그녀 자신은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러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좋아하냐는 한 여자아이의 질문에 좋아한다고 말하며 다시 웃는다.
박준영은 보증으로 돈을 탕진하는 아버지로 인해 가정형편이 어려웠기에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포기하려 했었다. 바로 그 때, 기적처럼 경후문화재단이 그를 후원하게 되어 그는 다시 피아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준영은 열심히 피아노를 연주했고 마침내 월드클래스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껏 걸어온 콩쿨의 길이 그리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아무도 곁에 없이 홀로 낯선 나라에서 대회를 준비해야 했고 우승 상금의 대부분은 집으로 들어갔다. 안식년을 맞이해 한국으로 돌아온 누구나 알아주는 월드클래스 아티스트의 통장 잔고는 삼백만원 뿐이다. 그는 콩쿨에서 반드시 우승을 해야만 하는 생계형 피아니스트나 다름없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던 그의 가방 속에는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내기 위한 신경안정제가 늘 함께였다. 그는 만약 자신에게 재능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힘든 삶을 살진 않았을 것이라는 넋두리를 한다.
그래서 준영에게는 음악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송아의 진솔함이 큰 위로가 된 것 같다. 피아노 연주를 마친 후 준영씨 본인에게도 만족스러운 연주였냐고 묻는 송아를 보며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한다. 그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 그러나 정작 스스로 물어야 했던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준 송아에게 큰 매력을 느낀다. 준영의 주변에는 준영의 실력을 통해 이득을 보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갉아먹으려 하는데, 송아는 피아노 반주를 도와주겠다고 자처하는 준영을 거절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보겠다고 말한다. 기회주의자들이나 이해관계가 얽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을 오랫동안 만나다 보면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다. 정말로 놓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 지 자각하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준영은 송아로 물들어가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난 후, 그녀에게로 계속해서 직진중이다.
류보리 작가는 인물들을 굉장히 입체적으로 잘 묘사하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준영의 레슨을 맡아준 유교수(주석태 분)는 강압적으로 준영의 콩쿨을 지도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개연성을 충분히 제시한다. 제자가 월드클래스 아티스트로 성장해서 기쁘지만 제자 덕에 유명해졌다는 계속된 뒷담화가 그를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게다가 유교수가 낸 앨범에 달린 ‘좋은 선생님이 언제나 좋은 연주자는 아니다’라는 악평은 큰 자괴감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10화의 포장마차 장면에서 홀로 소주를 들이키던 유교수의 모습은 잘 하고 싶은 것들을 잘 해내지 못해 씁쓸한 패배감을 맛보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었기에 너무나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잘 해내고 싶은 것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것을 잘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잘 하진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좋아한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감정이다. 더 나아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실력까지 인정받는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어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 뒤처지는 씁쓸함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큰 열패감을 느낄 수도 있다. 마치 송아가 뛰어난 연주자들을 동경하며 자신의 초라한 실력에 눈물을 흘리듯이 말이다. 아주 현실적으로 음대의 실상을 드러내주는 드라마이기에 송아가 갑자기 뛰어난 발전을 거듭하여 월드클래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처받고 상처받더라도 송아는 계속해서 바이올린을 좋아할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실력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송아는 자신이 딛고 선 냉정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지 다음회가 궁금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송아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기사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