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우리 집의 아침 풍경은 대체로 장난치며 도망 다니는 두 아이를 남편과 내가 잡아 와서 앉히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며 시작된다. 정신없이 가방을 싸서 등원을 완료시키고 나면 우리 부부는 그제야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실감한다. 남편이 멀리 출장을 가기라도 하면 이토록 정신없는 아침 일상은 나 혼자 오롯이 감당해 내야 한다. 이런 날에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좀 더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남편은 가끔 이른 새벽부터 행사 준비를 위해 일찍 집을 나서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연년생 육아와 프리랜서 일들로 인해 만성피로에 짓눌려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스스한 얼굴로 같이 일어나려고 애를 쓴다. 몸을 일으켜 기상하는 데 성공한 날에는 근사하진 않지만 그를 위한 소박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남편은 더 자라며 내 등을 떠밀지만 나는 그를 식탁에 앉히고 숟가락을 쥐어준다. 그가 밥을 먹고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연달아 하품을 한다. 남편이 신발을 탁탁 고쳐 신으며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는 문을 열다 말고 슬쩍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한다.
“챙겨줘서 고마워 여보. 아이들 등원 잘 부탁해.”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주부니까 당연히 남편 출근길을 배웅하는 거 아닌가 싶은가? 아이들을 돌보고 등원시키고 집안일을 하는 것도 엄마가 해야할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깟 프리랜서 일 해봤자 돈 얼마나 번다고, 차라리 때려치우고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나 더 신경 쓰란 말이 목구멍에 차오르는가? 아니면, 나는 결코 저렇게 집에서 다른 가족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살진 않겠다고 외치고 싶은가? 아이들을 돌보는 정신없는 일상을 감당할 깜냥은 전혀 없으니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여성인가 남성인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기혼인가, 아니면 비혼인가?
정아은 작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은 사회가 주부인 여성을 향해 강제하는 의무, 즉 가족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고정시킨 주부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파고든다. 정확히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제적으로 부여한 ‘주부’의 당연한 역할들에 대해 여성이 최선을 다해 잘 수행한다 해도 칭찬과 존경은커녕 ‘집에서 노는 사람’이라고 폄하받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꼬집어 비판한다.
그녀는 실제로 엄마로서, 워킹맘으로서, 그리고 전업주부로서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본인이기도하기에 삶 속에서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렸던 각종 성차별적 메시지를 가감 없이 솔직하게 서술하며 몰입감을 높인다. 여성인 자신을 몰아세우고 집으로 돌아가서 애나 보고 살림이나 잘 하라는 사회의 집단적인 메시지에 저자 역시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막연한 분노와 억울한 정서에 갇혀있기보다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사람들의 한 마디 말에 담긴 역사적, 문화적 함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내가 딛고 선 빙산을 볼 줄 아는 지력, 성실히 공부해서 몸에 익힌 논리와 같은 것들을 갖추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해묵은 거짓말 “집에서 논다”는 말에 제대로 대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저자는 ‘주부는 집에서 노는 사람’이라는 말을 양산했던 사회 문화적 배경과 주부가 담당하는 가사노동이 무상이어야 했던 이유를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찾는다. 먼저 그녀는 독일의 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인용해 자본주의가 자연스러운 인류발전을 통해 전개된 결과가 아니라 의도적인 탐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짚고 넘어간다. 그리고 카트리네 마르살의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을 통해 애덤 스미스가 만들어낸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전업주부인 여성의 노동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남성만을 모델로 한 개념이었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자본가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최저 생계비를 겨우 웃도는 임금을 지급하며 일을 시키는 동안 그 노동자를 매일 먹이고 돌봐주었던 여성의 모든 행위들은 철저하게 노동이 아닌 것으로 배제되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쓴 마리아 미즈 역시 여성의 노동을 철저히 배제시킨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란 실제로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재생산자(여성, 자연, 식민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동안 경제학이 철저히 무시하고 배제시켜온 재생산자라는 또 하나의 축이 무너지면 노동자와 자본가 역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책 속에는 이외에도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 계급론>, 레슬리 베네츠의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게오르크 지멜 <돈의 철학> 등 여성 문제의 쟁점을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줄 여러 가지 책들의 내용을 짚어가며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 준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돈을 버는 남성만을 노동자로 인정하고 집안일을 하는 여성의 행위는 노동이 아니라고 못박아온 성차별의 역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이 길고 긴 성차별의 역사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여성에게 무례한 말들을 양산해대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 공감하며 분노하기도 했다. 방대한 지식을 담은 이 작은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바로 그 동안 폄하되어온 여성들의 노동을 원래의 지위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히 돈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돈 한 푼 못 받는 집안일을 노동이 아니라고 천하게 취급한다 할지라도 집안일은 명백히 숭고한 노동이다. 그리고 숭고한 노동을 베푼 사람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나는 여전히 아침 일찍 나서는 남편을 위해 함께 먹을 아침밥을 준비할 것이고 집안일에 소질이 없다 해도 틈날 때마다 어지러운 집안을 조금씩 정리할 것이다. 남편이 바빠 자리를 비운 날에는 혼자라서 힘에 부치겠지만 그럼에도 아이를 잘 돌보기 위해 애쓰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 모든 행동들은 사회가 나에게 강제해서 이루어지는 의무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행위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내니까, 엄마니까와 같은 말로 누군가의 가치있는 노동의 행위를 의무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키는 일들에 동참하지 말라. 우리 모두는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기쁨을 느끼며 행복한 삶을 살 때가 되었다. 우리의 엄마들이, 나의 여동생들이, 나의 딸들이 하는 모든 사랑의 수고들은 아름답고 고상한 “노동”, 그자체이다.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도 기사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