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때, 수원

한 영혼의 여행 2022년 3월

by 글한송이

양손 가득 물건을 쥐고 있으면, 다른 물건은 집을 수 없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어쩐지 가슴이 꾸깃, 구겨진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마찬가지였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감정이든 똑같이 적용됐다. 문어처럼 다리가 여덟 개라 이것저것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법을 기대하기에 나는 너무 많이 커버렸다. 하지만 욕심은 끝이 없었고, 이를 어떻게든 덜어내려면, 바깥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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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은 서울 근교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경주 같았다. 도시 곳곳에 현대와 과거가 어우러져있었고, 이를 보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옷을 두텁게 입은 이들이 꽤 많았다. 이럴 때마다 괜히 대리 뿌듯함을 느낀다. 마치 내가 조선시대의 누군가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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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은 가볼 만한 역사 유적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수원 화성, 장안문, 북서포루와 동남각루 등 길게 뻗어있는 길을 유유자적 걸을 때면 나도 모르는 새에 욕심 덩어리들이 하나씩 해체되는 기분이다. 수험생을 괴롭히는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시조의 구절이 피부로 와닿는다. 모두가 이 세상을 물처럼 흘러가듯 살아간다면 어떨까 괜한 상상도 해본다. 각자 주어진 바에 맞게 살며, 괜히 아등바등 애쓰지 않는 그런 삶. 경쟁을 원하지 않는데 경쟁하면서 버티는 게 지쳐서 부질없는 소원 하나 빌었다.

어둠 속 수원 화성은 더 빛났다. 세계 어느 나라든 야경이 멋지지 않은 장소는 없겠지만, 수원 화성은 서울만 구경하는 외국인들에게 소개하기에도 손색없을 정도로 멋졌다. 곳곳에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는 곳들도 있었다. 그냥 보기만 하는 것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추측컨대, 보존 및 보전 문제만 해결된다면 우리나라는 문화유산 강국이 될 수 있다. 시민에게 이렇게 가까운 역사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이 다른 후발주자들에 비해 빠르게 깨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아픔을 겪고, 그를 통해 배우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민족성을 엿볼 수 있는 정기가, 수원에는 담겨 있었다.

수원 화성의 밤을 환하게 밝혀주는 일에 열기구도 한몫했다. 탑승객 후기에 따르면, 생각보다 별로 높이 올라가지 않고, 위에서 머무는 시간도 짧아 가성비를 챙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정말 타고 싶었다. 하늘 위로 올라가, 내가 얼마나 자그마한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내려다보기를 원했다. 그래야 내 어깨를 짓이기는 무게들이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씨 영향을 많이 받아 오후 내내 운영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왔을 때야 비로소 마지막 승객을 위해 솟는 '플라잉 수원'의 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붉게 물든 화성 위에 청명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라고 위로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부러운 마음에 사진을 연달아 찍어댔다. 그걸로 만족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배 아파하지 않고, 가질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 향한 수원이었으므로,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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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구를 깜빡 잊게 만들 정도로 맛있었던 음식은, 스페인 전통 요리였다. 지인이 며칠간 조사해 선택된(?) 레스토랑이었는데 고심 끝에 찾은 곳답게 맛이 훌륭했다. 음식 자체도 맛이 있었고, 서비스도 좋았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생한 정성이 전해져 이 날의 공기조차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실 이때까지 마음 한편은 허했는지도 모른다. 불투명한 미래와 확신 없는 인간관계, 약해지는 부모님을 볼 때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망연자실한다. 맞게 가고 있는 건지 불안하니 끝도 없이 추락한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어른들이 일단 먹고 생각하자고 하는 건가. 잠깐이나마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음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스갯소리지만, 돈 열심히 벌어서 스페인에 가야겠다는 발칙한 계획도 세웠다. 가서 뭘 하겠다는 건 아니고, 사진만으로도 군침을 돌게 하는 저 음식을 먹기 위해서.

드라마를 보면 결국 분에 넘치는 무언가를 탐한 자들이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왕위가 될 수도 있겠고, 권력, 돈, 선호하지는 않지만 본인만의 사랑을 위해서 일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시작이 별로였어도, 끝이 괜찮으면 나름 만족하는 편이다. 당연히 한결같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인생사가 반드시 그렇게만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끝 인상에 더 신경 쓰게 된다. 처음엔 좋았는데 마지막은 영 아니었다는 얘기보다는, 처음엔 별로였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는 이야기가 더 낫지 않은가. 그래서 질척거리는 면도 있다. 어떻게든 좋게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커서일까, 결론이 보이는 인간관계를 붙잡고 있기도 한다. 가장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남인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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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는 과거 불을 피움으로써 상황을 전달했다. 불을 1개 피우고 있을 경우는 평상시, 2개는 적이 나타남, 3개는 적이 국경 가까이 왔을 때, 4개는 적이 쳐들어왔을 때, 5개는 전쟁 중일 때를 의미했다. 우리는 매일매일을 전쟁처럼 살아야 하는 21세기의 극심한 혁신 속에 있다. 쫓아가는 것도 바쁜데, 더 앞서 나가기까지 해야 하니, 마음속 봉수대를 다섯 개, 아니 오백 개쯤은 켜 두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응원한다. 그리고 어느 날, 불이 점차 하나씩 줄어 뜨겁기만 하던 마음을 따스하게 유지하기만 해도 되기를 바란다. 놓아주어야 할 때를 안다는 건, 결국 어른이 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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