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연인 간 말다툼이 극에 달할 때까지 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대화였다.
여자는 당장 내려가자고, 남자는 싫다고.
왜 싫으냐는 물음엔 대답하지 않았을 거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질문은 무시했을 테지.
이윽고 불 같던 여자는 눈물을 쏟아내고,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떨궜을 거다.
앵앵대던 귓가가 고요해질 때쯤 멍한 나를 흔들어 깨운 옆집 청년 때문에 눈앞이 밝아졌다.
“저분이랑 말은 좀 나눠봤어요?”
자기 궁금한 것만 늘어놓느라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끝났어요.
여느 때처럼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섰고, 친구들은 저기서 사랑싸움 중이네요.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우정보다 사랑이 먼저인 건 순리니까.
“너, 나랑 헤어지려고 여기 왔니?”
혜림의 앙칼진 목소리는 축축해서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할 것 같았지만
딱딱하게 굳은 텅 빈 돌멩이를 조각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이한은 조용했다. 무언은 곧 긍정이라는데, 그런 의도였다면 오해 발생 가능성은 0%였다.
혜림은 기가 막혀 웃었다. 더는 입을 떼지 않았다. 우리들이 없는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을 뿐.
이한은 나와 옆집 청년을 바라봤다.
“이만 가요. 우리가 낄 자리는 아닌 거 같아.”
“나한테 우리는 김이한이랑 나예요. 당신이 아니라.”
산책을 나갔던 조그만 강아지가 덩치 큰 개의 짖는 소리에 놀라 낑낑대며 주인 다리를 긁어댈 때
맑고 깨끗하면서 떨리고 불안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가.
도와줘, 엄마, 나 무서워, 안아줘.
김이한이 그랬다. 내 친구가 나를 찾는다.
지난번처럼 모르는 척 뒷모습을 보이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나는 친구에게 다가갔다.
-
날은 어두워졌다.
여긴 김이한의 공간인데, 그래서 왠지 쌀쌀했다.
초겨울 차가운 공기 내음이 어깨에 긴장감을 더했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유지했다.
적막을 깬 건 나였다.
“나는 글을 쓰면 내려갈 수 있어.
흉곽출구증후군을 진단받고, 증세가 악화되면서 왼팔은 없는 것보다 못해서 포기했는데 말이야.
잘라버리고 싶었어. 떼어내면 안 아플 거니까.
두 팔이 있는데 글을 못 쓰는 것보단, 팔이 하나 없어서 관두는 게 낫잖아.
할 수 있던 일들에 제약이 생기고, 남들처럼 놀러 가는 건 꿈도 못 꿨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숨기기에 급급했고, 알던 친구들을 만나면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지 같더라.
몸이 아프면 나 스스로가 싫어져.
마음은 아닌데, 말로는 꽤 버르장머리 없어지거든.
그래서 혼자가 편했어.
남한테 상처 주는 나를 견디기란 힘들었지.
다 싫었어. 꿈도 포기했고, 목표도 사라졌어.
아마 그때였을 거야, 네 연락을 피했을 무렵이.
근데 사실 속으로는 굉장히 원했나 봐.
그토록 좋아했던 액티비티 스포츠도, 사람들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파고들어 공부해서 끝을 보는 것도, 글 쓰면서 살겠다는 것도,
포기하거나 없애버린 게 아니라 묻어뒀던 거야.
통증 속에서 하루 24시간은 지루하게 길거든.
지금은 아픔이 기억나는데도 오늘이 소중해.
그래서 난 내려가고 싶어.
이겨내서 다시 진짜 글을 쓰고 싶어.
나를 받아들이고 나니까, 내 하루가 탐나.
아파서 세상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바뀐 거더라.
그래서 다시 변화해 보려고.
사람, 마음, 시간, 공간.
다 욕심 나.
그리고 거기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좋은 친구잖아, 우리.
여기서 말고,
우리 추억이 묻어나는 옛 동네에서,
한바탕 재밌게 보낸 다음에
다이어리에 네 이름을 쓰고 싶어. “
들썩이는 어깨는 훌쩍임과 가쁜 호흡에 박자를 맞췄다.
어금니로 볼을 깨물어봐도, 앞니로 아랫입술을 꼬집어봐도 참아지지 않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