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밴쿠버, D-14
상상으로 가득했던 유년 시절에는 드라마처럼 다이내믹한 일들이 펼쳐지기를 바랐다.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지금은 오늘 하루가 평범하게 지나가기를 꿈꾼다.
몸이 아파 끙끙 앓았던 어느 날, 엄마는 내게 물었다. 10점 만점에 몇 점만큼 아프냐고.
다 나아갈 쯤에도 나는 괜히 2-3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엄마가 조금 더 돌봐줄까 싶었다.
병원에서 의사는 1-10 강도 중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운지 대답하길 바랐다.
강도 5 이하면 마치 꾀병으로 몰아갈 것처럼.
얼마 전, 열이 끓고 두통이 너무 심해서 나를 보러 밴쿠버까지 비행기 타고 날아온 친구들에게 미안하게도
같이 놀러 나갈 수가 없었다.
시험 공부 하냐는 친구의 문자에 "아파"라는 답을 끝으로 쓰러지다시피 누웠는데,
친구들은 곧바로 내가 지내고 있는 기숙사 건물로 찾아왔다.
밤새 간호를 받았고, 열이 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문득 궁금해서 퉁명스럽게 꾀병일 거란 생각은 안 해봤냐고 물었다.
친구는, 아픔에는 강도가 없고, 꾀병을 부리는 거면 그건 마음이 아픈 거라
뭐가 됐든 찾아갔을 거라고 답했다.
눈 뜨고 나니 다음 날이었던 보통의 날이 따스한 분홍빛 하루가 되었다.
귀국을 약 열흘 남겨둔 어느 날,
동생이 밴쿠버로 찾아온다.
떨어진 지 23주 만에 만나는 가족의 향기란
벌써부터 그립고 반갑다.
한 달 평균 강수일이 보름인 밴쿠버의 가을에
자칫 지루함이 커져가는 나날들이
기대와 설렘으로 바뀌었다.
남들에게는 그저 똑같은 날들이겠지만,
평소라면 나에게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이겠지만,
반가운 사람들의 애정이 더해지는 순간,
그 보통의 하루는 이루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해진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없는 강아지에 대한 소식이
줄어들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표현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조용한 것임을 익혔다.
매일이 피곤하겠지만, 잘 버텨주고 있는 내 못생기고 귀여운 반려견에게 고맙다.
꼭 껴안아줄 날을 기다리며 매일 그를 떠올릴 수 있는 오늘이 좋다.
내 컬리지 졸업 날과 출국 날에 찾아가도 되냐는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의 연락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지브리 영화 속 ost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느낌이랄까.
문득 행복했던 때가 떠올라 미소 짓게 되는 표정이랄까.
감히 내가 이런 인연들을 만나 삶의 한 페이지를 맑고 밝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정말 평범한 나날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서로의 기억에 한 부분을 공유한 잊지 못할 때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과 다르게 나는 평범한 날에 감사한다.
누군가에게는 재미없는 하루 일 수도 있고,
또 다른이 에게는 그저 익숙한 시간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연한 순간을 안정적이고 뿌듯한 1분 1초로 생각한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평범함 속에 특별함이 녹아든,
어느 보통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