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이 나이에 외국인노동자를 자처해서 해외살이를 하는 이유.

by merry go round

어릴 때부터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궁금하면 그냥 바로 했어요.

오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일단 행동이 먼저 나가요. 그다음에 생각을 합니다.

하길 잘했는가, 하질 말았어야 했는가.


제 나이 다섯 살 때였어요.

색종이 오리는 가위를 손에 들고 앞머리를 잘라요.

티비에 나오는 최진실 언니 앞머리가 예뻐 보였나 봐요.

그래서 그냥 잘랐어요.

당연히 삐뚤빼뚤 엉망진창이었죠.

손에는 가위를 쥔 채,

벽에 기대어 손들고 서있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사진이 아직도 본가를 가면

가족 앨범에 남아있어요.


부모님이 그러십니다.

너는 진짜 네가 하고 싶은 건 그냥 다 해야만 하는,

그런 아이였다고.

어릴 때부터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고 싶은 건 해야만 했어요.


보통은 공부나, 하고 싶은 일이나,

취미나, 장래희망의 대한 것들이었는데

해야겠다 한 번 생각하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성격이 있습니다.

안 되겠는 이유보단, 어떻게 이걸 해내야 할지

그것만 바라보고 달리는 성격이에요.


보통 어린아이들이 그러죠.

생각하기 전에 행동을 먼저 한다고.

그런데 전 어른이 되어서도 이모양입니다.

그냥 타고난 성향인가 봐요.

일단 행동하고 봐요. 그다음에 생각을 하죠.

정확하게는 생각을 단순하게, 짧게 합니다.

생각의 깊이는 자라지 못한 채,

몸만 큰 어른이 된 걸까요?

사실 그건 아니에요.

이 나이만큼 살아오다 보니,

생각이 너무 많으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 나이에 외국인노동자를 자처하며

싱가포르 살이를 하고 있나 봅니다.

정신없이 런치 장사를 쳐내고,

브레이크 타임에 레스토랑 한편에 앉아

이렇게 아이패드를 펼치고 앉아

글을 쓰며 보내는 쉬는 시간,

제 스스로도 전 참 신기하고 희한한 사람 같습니다.


전 어딜 가던지 놀라우리만큼

적응력이 참 빠른 편이에요.

여기 오기까지도 그렇게 깊은 생각을

많이 하진 않았어요.


그냥 왔습니다.

싱가포르, 여행으로도 한 번 안 와본 이곳에서,

그냥 한 번 살아보고 싶어서요.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뭐.

기왕이면 다른 세상을 경험해 보는 건

나에게 또 다른 힘이 생기는 게 아닐까,

세상을 헤쳐나갈 힘.

그 힘이 생길 것 같다는,

그냥 그런 모호한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한 단계 한 단계씩,

바로 그다음 스텝만을 생각하는 습관을 들인 덕분일까요,

단순함을 가진 제가 비교적 남들보다는 쉽게,

싱가포르행을 택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 너무 먼 미래는 잘 내다보지 못하고,

계획하지도 못합니다.

아니 사실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성격에도

계획적으로, 체계적으로 잘 살아오던 제가

이십 대 초반에 호주 시드니살이 1년을 하면서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계획표를 어떻게든 지켜서 살아가려고 하기보단,

세워둔 계획에서 오류가 나는 순간,

빠른 대응과 대처를 하는 쪽으로요.

MBTI로 말하자면, 이십 대 초반 까지는 파워 J였다가,

시드니살이 1년 이후로는 파워 P로 변했습니다.

대신 계획형 P로요.

계획은 여전히, 꾸준히, 잘 세우는데,

그 계획이 다 틀어져도 괜찮아요.

아 어떻게 해,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빠르게 해결하지?

쪽으로 변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매일매일 계획표를

시간 단위로 적어 생활하던 저였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타지, 그것도 외국에서

홀연단신 혼자 살아가다 보니 사람이 변하더라고요.


이십 대 초반에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 것들이에요.

삶은 내가 계획한 대로 절대 흘러가지 않고,

세상엔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있으며,

그것을 해결해 나갈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고.

스스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며

하루하루 살아내야 한다고.

그걸 좀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른이 된 거라고 말입니다.


정식으로 나오기 전 잠시 짬을 내어 싱가포르에 왔던 2월 중순, 업무 미팅했던 날.

꾸준히 이력서는

사이트마다 업데이트해서 올려두긴 했습니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20년이란 시간 동안 일은 거의 쉬질 않고 쭉 해왔어요.

호텔, 레스토랑, 잠실에서, 청담동에서, 서초동에서,

정말 다양한 곳에서 일을 했어요.


졸업 후 시드니에서

초밥 롤만 1년 동안 수만 줄을 말다가 왔고,

다시 또 호텔에서,

그 이후엔 이십 대 중후반에 개인사업자로,

케이터링 하며, 파티디렉팅, 웨딩애프터파티 만들며

몸 갈아 넣어 일하고,

코시국에 사업 접고

해외주방브랜드 마케터이자 레시피 개발자로

일하기를 또 몇 년.

다시금 원래 하던 나의 일이 하고 싶어 사업자를 내고,

추가로 푸드스타일링일을 배우기를 또 일 년.

그러다가 헤드셰프를 제안받고 싱가포르를 오게 됩니다.


다신, 진짜 너무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주방으로 돌아가지 말아야지, 했는데.

어느덧 다시 전 조리복을 입고,

한국도 아닌 싱가포르에서,

레시피를 개발하고, 한식을 요리하며,

셰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네요.

사람일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냥, 어떻게 나에게 이런 기회가 찾아왔을까,

올해 사주에 그렇게 물 건너 나간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게 진짜 바다 건너 해외에 나와

살게 되는 팔자일줄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돌이켜보니

어, 나 왜 싱가포르에 나와 있는 거지? 싶지만,

그냥 하루하루 살아내다 보니

여기까지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미팅차 방문했던 지난 2월의 라오파삿 꼬치구이 야시장

음 -

생각보다 싱가포르는 서울과 많이 닮아 있어서,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은 것 같아요.

먹는 건 뭐 - 한식이 그리울 수 없는 환경이기에,

아주 잘 먹고 있고요.

가끔 쉬는 날 여기저기 다녀보긴 하지만,

이젠 이십 대 초반 시드니 살던 때와는

체력도 나이도 곱절이어서

쉬는 날이면 집에 가만히 송장처럼 누워

쉬는 하루를 보내곤 합니다.


대단한 목표가 있는 건 아닌데요,

여기까지 온 이상,

최소한 적어도 미슐랭 빕구르망이라도 받고 싶다-

이 정도가 목표인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이루고 나면,

그다음 목표가 또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미팅차 방문했던 지난 2월의 싱가포르, 투숙했던 호텔의 1층 바에서 바텐더가 찍어준 사진

너무 한 번에 많은 것을 이루고자 목표하진 않습니다.

그냥 당장은,

그동안 내가 알고 지내오던 것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싱가포르식 영어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 중이고,

퇴근 후 샤워하면서 보는 ott 드라마의 자막을

영어로 두고 보려고 하는 편,

하루의 단 한 글자라도 레시피북을 읽고

공부하려고 하는 편,

너무너무 운동하기 싫지만,

누워서 하는 운동이라도,

하루 단 10분이라도 하려고 애써보는 편,


이 정도가 저의 현재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일단 뭐라도 해보고자 애쓰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으니,

일 년 정도 흐른 뒤 뒤돌아보면,

그래도 굽이굽이 자갈돌밭을

잘 걸어오지 않았을까요,?

F1이 열리는 나라에 일하러 온

초보 외국인노동자(?)의 신분으로,

매 달, 하루하루를 여행하는 기분이자,

현지인이 된 기분으로

잘 살아가보겠습니다.

저보다도 먼저 해외살이를 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크고 작은 팁들을 알려주셔도 좋겠어요.


당장 1년 후의 저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별다른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싱가포르가 궁금해서 훌쩍 떠나온 저에게,

제 인생에 무언가 변화가 있겠지요.

저도 제 삶의 예상궤도를 알 수 없어 궁금합니다.


그때까지 조금씩 여러 느끼는 점들을 공유해 볼게요.


벚꽃도, 계절의 변화도 느낄 수 없는 나라에서,

그렇기에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감이 오질 않는 곳에서,

앞으로의 일상을 조금 더 특별하게 기대해 보며 -


see ya, everyo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