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댁’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그곳은 단순한 시골집이 아니라 어린 시절 내 모든 감각이 깃든 우주였다.
여름이면 사랑방 마루에 걸터앉아 앞뜰에 활짝 핀 파란 수국을 바라보던 오후가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투박한 손과 나직한 목소리 옆에서 수국 꽃잎처럼 흩어지던 시간들.
사락사락-바람에 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대나무숲에서 숨죽여 웅크리고 숨바꼭질 하던 순간들,
음매음매- 우는 소의 눈망울을 보러 가는 길에 툭- 튀어 오른 청개구리가 내 입술에 닿았던 순간의 놀라움도,
바닷가 모래성과 작은 게들의 분주한 움직임도 모두 그 여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차가운 겨울은 또 다른 온기로 가득했다.
대나무숲 근처 땅굴에서 꺼내온 고구마가 할머니의 화롯불 위에서 샛노란 속살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던 조바심. 뜨끈한 아랫목에서 호호 불어가며 먹던 그 달콤함은 그 어떤 진미와도 바꿀 수 없는 맛이었다.
꽁꽁 언 언덕에서 외삼촌이 끌어주던 포대 썰매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내려오던 그 짜릿함,
깡깡 언 논바닥에서 뻘뻘-땀까지 흘리며 나무 썰매를 힘주어 끌던 그 뿌듯함까지도.
하지만 남겨진 사람과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추억 속 그 집은 이제 펜션이 되어 더 높이 올라갔고 더 세련된 모습으로 변했다. 더 편리하고 더 아름다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새로운 모습보다 기억 속 모습이 더 뚜렷하고, 더 그립다.
파란 기와지붕과 너른 마당, 앞뜰과 뒤뜰을 둘러싼 산들,
그리고 무엇보다 웃는 얼굴로 남아있는 사랑하던 사람들.
이 모두가 현실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다.
아니, 어쩌면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 또렷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의 모든 순간이 경이로움의 연속이었고,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넘치는 애정과 행복이 머물던 자리였다.
현실은 변하고 사람들은 떠나갔지만, 마음속 풍경은 언제나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내 기억 속 외가댁은 여전히 파란 수국이 피어있는 여름이고,
고구마 구워 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이 머물러 있는 겨울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런 식으로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건가 보다.
변해버린 현재 위에 변하지 않는 추억을 포개어 놓으면서. 그리고 가끔씩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시간이 멈춘 그곳에서, 파란 수국이 영원히 피어있는 여름에서,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그 겨울에서. 내 기억 저편의 외할머니댁에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고.
<작가 노트>
이정훈 작가의 신간, 위로는 서툴수록 좋다를 읽으며 폐역된 안강역이 나에게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떠올린 추억을 글로 만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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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