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떠날 시간

by 나연

임용 시험을 치지 않아도, 생기부를 쓰지 않아도 올해 같은 12월은 기분이 좋지 않다. 계약이 만기라서 곧 이곳에서 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나는 이 재단 학교로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닌척했어도 나는 여기 일원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곳이 원하는 것을 살뜰히 하지도 않았으면서, 늘 뭔가가 부당하다고 여긴다. 사립의 합불 기준을 알 수 없어서 작년까지 시험을 치고 올해는 치지 않았다. 그냥 그 정도 했으면 넘어가 주면 안 됐으려나 하는 떼쓰는 아이 같은 기분도 든다.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이곳의 일원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을 보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잘 되는 모습을 영영 보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 사람도 될 거였으면 진작 됐어야 했던 거라고 동료에게 말했는데 그 안에 나만 아는 가시가 가득하다. 안 그래도 인심 없는 마음이 나날이 옹졸해져 간다. 대입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아무렇게나 공부했던 애들이 국립대도 가고 사범대도 가는 걸 보고 있자니 남모를 화가 더 난다. 공부하면서 잘못한 거 많았지만 저들보다는 내가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학교에 있는 시간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어서 패배감이 강화된다. 퇴근할 때쯤엔 한껏 우울해져 있다. 인생이 뭐가 달라질 수는 있는 건지, 더 나빠지지 않고 나아질 가능성이 있는 건지,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하다.


집에 오면 기분이 나아지긴 하는데 문제 회피 상태에 가깝다. 맛있는 걸 시켜 먹고, 넷플릭스로 내 삶과 한 군데도 닮지 않은 드라마나 영화를 본다. 그리고 이곳을 영영 떠나기 전에만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는 장거리 해외여행들을 계획하고 있다. 겨울 방과 후 수업도 거부했고 2월 워크숍도 내겐 해당이 없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어쭙잖게 삶을 한 방향으로 가둬놓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이 일을 못하면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 최근에 읽은 류시화의 에세이 산문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의 한 에피소드에서 한 가정의 생계를 겨우 유지하게 하는 뼈 마른 암소를 벼랑으로 밀어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을 그만둘 디데이가 다가올수록 감정 기복이 널뛰고 불안해서 그 이야기를 생각하려고 한다. 정체성에 준하는 뭔가를 벼랑으로 던지는 건 그냥 그 자체로 아주 불안한 일이 맞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되뇌면서 지낸다.


오늘 중등 임용시험 첫 번째 점수가 발표가 났다고 한다. 출근을 했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지친 고인 물 수험생들이 지쳐 나가떨어졌는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낮은 커트라인 점수가 보였다. 마음이 복잡 미묘하다. 공부를 하는 데엔 마음의 품이 든다. 운이 없는 시기에 비싼 품을 다 지불해서 힘을 다 빼고 나니 놀리듯이 그런 점수를 보여준다. 시험과 관련해서는 나는 항상 레드 오션에 서 있는 편이다. 꼭대기에 있을 때 매수해서 바닥칠 때까지 놓지 못하다가 지쳐서 손절하면 갑자기 호재를 맞이하는 주식처럼.


오늘은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계약 연장 여부와 관련된 전화를 돌리는 날이기도 했다. 최대 연장 기간을 다 소진했기 때문에 어차피 나는 떠날 사람인 것은 맞지만 정말로 전화가 오지 않으니 한층 허한 기분이 든다. 진짜 내가 이곳을 떠나는구나. 나름대로 애썼던 시간이 참 허무하고 부질없다. 이곳 사립재단 시험은 그동안 몇 번이나 힘들게 쳤지만 이번에 안쳤더니 미련 없이 보내주는 느낌이다. 그냥 이곳에서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장기말이었을 뿐인데 괜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이곳과 이 시간을 떠나서 그때 영어 선생이 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미래를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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